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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풀뽑기 / 조순영

풀뽑기 / 조순영

 

 

 

 

얼마 전에 20년 넘게 한문 공부를 같이하는 후배가 하모니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 시작했구나.

내 눈은 반짝거렸다. 배움의 기간은 길지 않지만 그녀가 일단 하고자 뜻만 세우면 못하는 일아 없는 사람이다. 이번에도 뜻을 세웠으니 이루어 내고야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날 사물놀이 교실에서 처음 만나서 공부를 해왔다. 한동안 경기도 북쪽 요양원과 인사동 거리공연, 구청 행사 공연도 함께 다니다보니 쌓인 정도 깊다. 그녀는 하늘을 향해 징채를 흔드는 내 모습이 좋았다고 말한다.

내가 퇴직 후에 제일 먼저 했던 공부가 서예였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습하다가 참을성이 없어서 그만둔 서예까지도 그녀는 높은 경지에 올라가 있다. 내가 살아온 삶 중에서 그때 도중하차한 서예가 지금까지도 아쉽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란 하고자 하는 의욕만 가지고 쉬지 않고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긴 시간 쉬엄쉬엄하는 것도 공부의 한 방법이리라.

나이는 나보다 너댓 살 아래지만 그녀는 배움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하는 친구다. 생활면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배움에는 가방끈의 길고 짧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녀를 보면서 알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고자 하는 의지다. 내가 해 보니 배움을 실천으로 옮기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마음으로 하고자 결정만 내리면 못하는 일이 없다. 젊었을 때 친구들을 불러서 집에서 밥도 해 먹이며 친분도 다졌다. 야외 소풍 때는 음식을 도맡아서 사 오거나 만들어 오기도 하니 매사에 그녀의 열정과 정성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서울 북쪽에서 용인으로 이사 온 지 삼 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한문 공부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그녀가 내게 끼치는 영향도 한몫한 것 같다.

많은 사람 중에 같은 취미로 긴 세월 함께 하기도 쉽지 않다. 어쩌다 보니 쌓인 세월만큼이나 이심전심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지 않을까. 언니 같은 동생이어서 마음으로 많이 의지가 되는 친구다.

작년에 중국 황산에 갔을 때 그녀는 켜켜이 쌓인 한을 풀어 놓았다. 공부가 하고 싶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어머니는 밭이랑의 풀을 모두 뽑으면 학교에 보내준다고 했단다. 그녀는 그런 어머니의 말만 믿고 열심히 풀을 뽑았단다. 다 되었다고 하고 저 위 고랑을 쳐다보면 거기엔 어느 사이에 풀이 오소소 나 있더란다. 위쪽을 뽑고 나면 아래쪽에 풀이 나있고 다른 한쪽을 뽑으면 한쪽은 언제나 풀 자리가 마를 사이가 없다 보니 공부할 길은 멀고 어머니에게 항의도 못하고 너무 지치고 힘이 들어 속만 태우다 상경해서 직장에 다니다 결혼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어진 남편 만나서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김유정의 단편소설 봄봅생각이 났다. 점순이가 키가 크면 결혼을 시켜준다는 장인 될 사람의 말만 믿고 점순이와 결혼을 하고 싶은 욕심에 새경도 받지 않고 머슴으로 죽도록 일만 한 남자의 이야기다.

공부하는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환히 웃는 그녀는 외손녀가 어렸을 때 키워 주었다. 때로는 키워주던 어린 외손녀를 데리고 와서 공부를 할 때도 있었다. 하루는 비 오는 날 한문 교실에 갔더니 그날도 그녀 옆 유모차에서 외손녀가 자고 있었다. 우리는 가끔 외손녀를 우리 학우라고 불렀다. 유모차에 앉아서 공부하던 외손녀가 할머니를 닮아서인지 자라면서 공부도 잘하고 사려도 깊단다.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빵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듯이 할머니 손에서 자란 외손녀가 지금은 그 친구의 자랑스러운 친구며 조언자란다. 낳은 공은 없어도 키운 공을 있다는 말을 그녀에게서 배우게 되었다. 그녀는 선생님이 칠판을 지우려 하면 재빨리 나가서 칠판을 지우면서 잔잔한 감동을 준다.

나도 그녀의 열정을 닮고 싶다. 정열과 투지까지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면서 따라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하모니카를 배운다는 말에 자국을 받아서 하모니카를 배우기 시작했다면 나로선 더 바랄 것이 없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신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일은 실행할 만한 힘을 다 가지고 있는 법이다.”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을까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괴테는 말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