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의 약속 / 배정순
아버님, 어머님 부족한 며느리를 항상 이해하시고 묵묵히 바라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OO이의 첫 울음소리에 감격하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 지났습니다. 늘 열려해 주시고 보살펴주시는 부모님이 계시기에 이렇게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고 있습니다. 앞으로 OO이가 아버님의 자랑스러운 손자로 자랄 수 있도록 더욱 힘쓸 것이며, 며느리의 본분을 다하겠습니다.
며느리 올림
위의 글은 우리 집 거실 액자에 15년째 걸려 있다. 큰아들과 며느리가 손자의 첫돌을 맞이해 우리 부부에게 스스로 쓴 서약이다.
28년 전 큰 아들이 결혼해서 딸 둘을 낳았는데 둘째가 일 년 만에 저세상으로 갔다. 그 후 10년이 되도록 임신 소식이 없자, 외아들인 남편은 큰 아들을 볼 때마다 “아직 기쁜 소식이 없느냐?”고 볼멘소리로 채근을 했다. 넓은 공원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신나게 타고 다니는 똘망똘망한 사내애들을 볼 때마다 남들은 걱정 없이 아들을 잘도 낳는데, 아무래도 우리 집에 대가 끊기게 되었다며 근심어린 넋두리를 하곤 했다. 남편이 초조하게 장손을 기다리는 모습을 본 아들과 며느리의 마음은 편할 리가 있었겠는가. 며느리의 친정 부모님께서도 우리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안사돈께서 며느리를 산부인과에 데리고 가서 진료를 받게 하고 한의원에도 같이 가서 임신에 좋다는 한약을 기어주셨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간절함을 외면할 수 없어 삼신 할멈이 점지해 주셨는지 그토록 기다리던 손자가 태어났다. 아들은 겨우 20일 된 아기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대보기도 하고 발을 만졌다 손을 만졌다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뭉클했다. 저렇게 좋는 걸 십 년 동안 얼마나 기다렸을까. 측은함이 몰려왔다.
“그렇게 좋으냐?” 아들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남편은 자신의 소원을 풀어준 며느리에게 두뇌발달에 좋다는 호두를 사서 갔다 주기도 하고, 보신용으로 가물치를 사와 나에게 주면서 푹 끓여 며느리에게 먹이라고 하였다.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아들 집을 매일 오가면서 미역국도 끓여주고 밑반찬이며 산모에게 좋다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고 아기 목욕시킬 때도 도와주었다.
남편은 전직 교사였다. 우리는 아들 셋 딸 한 명을 두었으나 남편의 기대에 못 미쳐서인지 항상 불만스러웠다. 남편 친구분들의 자녀가 출세했다는 말을 듣고 집에 돌아오는 날은 어김없이 하는 말이 있다.
“엄마가 머리가 좋아야 자식들이 잘된다.”라고 에둘러 말했다. 옆에서 그 넋두리를 듣고 있노라면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찌하란 말인가.’ 허공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결혼 전 친정아버님께서 여자는 시집을 가면 시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손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제일 큰 여자의 본분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기에 그 교훈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맹모삼천지교니, 신사임당께서 이율곡을 길러낸 가정교육이며 여러 위인전집을 읽어 보았으나 도움을 주지 못했다. 남편과 결혼해서 첫아들을 낳았으나 워낙 몸이 약해서인지 삼 개월 후부터 크고 작은 병치레가 끊이지 않아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내 머리가 총명치 못하니 그 유전자가 어찌 우수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자식들은 성실하고 건강하게 살고 있어 고맙기만 하다.
세상에 훌륭한 자식을 원치 않은 부모가 아디 있을까만 남편이 그토록 자랑스러운 자식을 원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돌아가신 시아버님이 생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집안이 가난하여 배우지 못했으나 너를 이만큼 가르쳤다. 너는 최고 학부를 나왔으니 너보다 더 많이 가르쳐서 가문에 영광스러운 자식들로 키워야 한다고 유언처럼 말씀하셨다. 남편이 시아버님과의 유훈을 지키기 위함도 있겠으나, 수많은 제자들이 사회 곳곳에서 각자의 재능과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모습이 보람 있고 흐뭇한데, 정작 자신의 아들딸은 그 기대치에 못 미치니 그토록 자랑스러운 자식을 소원하셨던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며느리는 남편의 간절한 소망을 헤아리고 손자에게 조기교육을 세심하게 잘 시키고 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사회성을 길러주기 위해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게 하였다. 밤에는 매일 같이 며느리의 무릎에 손자를 뉘어놓고 책을 읽어 주었다는데, 재미있는 동화책을 읽어주면 새벽 2시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여섯 살 때부터는 어려운 논어나 대학, 중용, 세계사 등을 읽어주면 스르르 잠이 들곤 하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거의 매일 독서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어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고양시 도서관과 지역신문이 함께하는 책 100권 읽기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일 년간 사서 선생님과 자기가 읽은 글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을 마쳤는데 고양시 신문에 논어를 들으며 잠자는 아이로 게재되기도 했다. 며느리는 손자에게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다 주기 위해 자신의 키의 반쯤 되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다니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빌려오고 반납하기를 계속하고 있다. TV시청에도 연령 제한을 두었고 책에도 연령 제한을 두어 한국문학이나 세계명작 등은 중학교에 들어가서 제한 없이 자유롭게 읽게 했다고 한다.
동사무소에서 무료로 가르쳐 주는 주산을 배우게 해서 암산은 물론사칙연산도 빨리할 수 있어 수학에 자신감을 갖게 했다. 건강한 신체를 단련시키기 위해서 각종 구기종목은 몰론 축구에도 소질이 있어 고양시 청소년 대표로 원정 시합에 나가기도 했는데 스포츠를 통해 협동심과 판단력, 페어플레이 정신을 길렀다. 며느리는 그때마다 손자를 따라다니면서 안위를 보살펴 주었고 그날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바둑에 취미가 있어 긴 시간 동안 깊이 집중할 수 있는 힘을 길렀고, 손익을 계산하면서 수리력이 향상되고 새로운 상황에 놓였을 때 대처능력이 생겨 창의적인 문제해결력도 길러지게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손자의 장래희망이나 취미, 평소 의견을 항상 존중해 주고 있다. 며느리는 아들의 사업이 불경기로 집안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마디 불평 없이 때로는 알바까지 해가며 손자의 뒷바라지를 해내고 있다. 손자는 며느리의 성품을 그대로 닮아 언제나 온화하고 성실하며 말없이 실천하는 아이다.
손자는 학교에서 과학 예술 영재학교를 추천해서 시험을 보았고 면접을 거쳐 토론을 끝으로 올 8월에 반가운 합격 소식을 들었다. 우리 가족들은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뻤다. 며칠 수 며느리가 손자의 학습 평가서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여러 방면의 책을 많이 읽어서 수학과 과학에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깊이 있게 생각하고 탐구하는 자세가 습관화되어 있어 과학도로서 삶이 기대 된다.”라고 적혀 있었다. 며느리의 노력과 정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토록 소원하던 남편의 한이 반쯤 풀린 셈이다.
내가 시아버님의 유훈을 받들지 못한 것을 큰며느리가 대신 노력하고 있어 그 갸륵한 정성에 한없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어린 묘목이 자라 가지가 무성하니 그 열매가 튼실하고 알차게 열리도록 더욱 힘써주기 바란다고 내 마음을 전했다. 남편은 며느리에게 적으나마 금일봉을 하사하며 네가 내 소원을 반쯤 풀어주어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였다.
손자가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수학 이론을 확실하게 다져서 산업수학에 데이터 분석을 위해 코딩을 전문적으로 학습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손자가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손자의 노력과 며느리의 정성이 있는 한 우리에게 서약했던 것이 지켜지지 않을까 행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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