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멋을 담다 / 문선자
한 줌의 햇살도 그냥 흘려버리기 아까운 가을날이다. 자연이 키워 낸 제철 재료와 세월이 묵묵히 빚은 장으로 밥상을 차려본다. 거창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어머니가 차려주신 지혜로운 밥상처럼 소박하고 담백한 맛이 깊어서 눈과 마음을 맑게 한다. 자연을 담은 밥상을 통해 나는 맛과 멋의 철학을 배운다.
향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 끝에 요리 자격시험을 보기로 했다. 여성에게 활용도가 높은 조리교실을 운영해 보고 싶었다. 아마 나의 마지막 일터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필기시험 준비로 하루 두세 시간 꼼꼼히 책장을 넘겼다. 알람이 울리지 않아도 아침 다섯 시면 일어나서 해내야 한다는 집념으로 이겨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공부라서 오랜만에 책을 잡았는데도 그 자체가 재미있다. 뭐든 하나하나 이해하려고 이 책, 저 책을 뒤져보기도 하고, 책 내용 전체를 머리에 집어넣고자 열심히 공을 들였다.
필기시험을 쳤다. 놓은 점수로 합격해 숨길이 열렸다. 다음엔 실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학원에 등록했다. 음식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요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수시로 질문하고 만들기를 거듭 반복했다. 익히고, 지지고, 튀기며 맛과 멋을 내기 위해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첫 번째 실기시험에서 쓴맛을 봤다.
조리에 뛰어나다는 선생님의 칭찬에 합격할 거라고 믿었건만 국가 공인자격증을 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은 멀었다. 음식의 맛을 내는 것엔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지만 눈으로 보아 산뜻하게 멋을 내는 것은 부족한 모양이었다. 머리가 무겁게 내려않았다. 어쩌면 그동안 자격증을 손에 쥐고 싶은 욕심에 마음의 준비보다는 겉멋 부리는 것에만 치중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좀 더 겸허히 나를 가다듬어 공부에 매진하기로 했다. 시험이란 어차피 고독한 싸움이 아닌가. 좋아서 하는 일이나 기쁘게 생각하고 합격할 날을 위해 줄달음쳤다. 조리실습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동영상 강의를 보며 공부했고, 컴퓨터 안에 눈이 들어갈 정도로 몰입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탄탄한 실력을 쌓을 수 있어 폭풍 같은 실기시험을 편하게 쳤다.
고득점으로 합격이란 두 글자가 눈과 가슴을 울렸다. 합격을 확인하는 순간 요리 선생님의 말씀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요리는 맛과 멋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는 것도 중요하지만 멋도 그릇에 따라 입맛을 당기게 한다며 가르쳤다. 음식을 만지는 손동작도 정성에 따라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차려진 밥상을 본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어 음식의 맛과 멋을 내기에 좋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나오는 재료로 조리할 수 있는 음식이 무궁무진하다. 영양소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 활기를 되찾는 데 봄나물이 있다. 그리고 뽀얀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얇고 동그랗게 빚어 진달래꽃을 띄우면 봄이 활짝 퍼진다.
무더운 여름에 입맛을 찾는 데는 장아찌가 으뜸이다. 제철에 나는 각종 야채를 된장이나 고추장, 간장 속에 넣어 노랜 시간 삭히면 담백한 맛을 낸다. 한 겨울에 땅을 비집고 올라온 귀한 쑥, 여성의 몸을 따뜻하게 돌봐주며 겨울에 움찔했던 몸을 깨워주기도 한다. 이런 쑥을 고추장에 숙성시킨 장아찌를 양념에 무쳐내면 잃었던 밥맛까지 되찾아준다.
풍요로운 가을에 추수한 쌀은 생명이다. 가을이면 가장 먼저 떠오러는 음식이 송편이다.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송편을 만들면 정도 끈끈하게 해 준다. 멥쌀가루에 단 호박, 치자, 자색고구마, 연잎, 비트 가루 등 오색으로 익반죽한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든 송편을 천연방부제인 연한 참 솔잎을 깔고, 시루에 쪄내면 입안 가득 솔향기가 퍼져 가족의 화합을 더해준다.
언 발을 동동 굴리는 겨울철에는 속이 따뜻해지는 국물 음식이 제격이다. 기다림의 미학 중 갈비탕이 최고봉이다. 밤새도록 우려낸 사골 진국은 어머님의 정성과 기다림으로 주는 선물이다. 음식을 만들 때면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손맛을 그려내려고 노력한다. 외할머니가 만드신 유과 맛은 요즘 보기 드물다. 손으로 일일이 빚어 따뜻한 아랫목에 말려가며 며칠씩 정성 들여 만든 작품이었다.
어머니의 고추장 장아찌 맛 또한 잊을 수 없다. 냉이를 살짝 쪄 고들고들하게 말려서 고추장에 숙성시킨 장아찌는 어머니만의 맛이었다.
두 분의 손맛을 닮은 나도 꿈을 품어본다. 오랫동안 꿈을 간직한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간다. 꿈을 이루기 위한 나만의 열정과 창의성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삶에서 미래가 소중한 만큼 그 미래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어렵게 딴 자격증으로 열심히 공부한 결과 조리교실 문을 열게 됐다. 그동안 배우고 익힌 것들을 요리에 맛과 멋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전해 주고 싶어서다.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누어 줄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 생각만 해왔던 일을 실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론과 실습을 함께 병행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열정과 초심을 잃지 않고 오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리교실을 연다.
곱게 물든 단풍잎을 들여다보듯 오늘도 내게 주어진 길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잰걸음으로 종종 거닐던 일상에서 돌아와 부엌에 설 때가 나는 가장 즐겁다. 나만의 요리분야를 만들어내고 개발하며, 창의적인 인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맛을 담아 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가을바람이 가슴으로 숭숭 드니 텅 빈 하늘을 채우고 싶다. 어머님의 사랑으로 우리 가족들을 웅숭깊게 품듯 나 또한 빈 항아리에 맛과 멋을 담아 가득 메우고 싶다. 이번 가을에는 어떤 색으로 물들여 볼까. 벌써부터 마음과 손이 분주해진다. 도공의 혼으로 빚은 도자기 그릇에, 맛과 멋의 결정체인 고명 한 줌을 올리면서 그윽한 미소로 가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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