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 이승숙
봄비가 여름 장마처럼 퍼붓는다. 짧은 봄꽃의 향연은 그렇게 스러지고 연녹색 들판은 초록빛으로 짙어진다. 찬란한 봄빛의 자연 앞에서 삶의 불빛을 잃고 있었다. 몸과 마음으로 봄을 앓는 내내 지루한 봄비는 가슴을 타고 내렸다. 침잠하며 온 종일 나만의 공간 속으로 빠져 들면서 잠 못 이루는 밤, 긴 시간의 외로움과 고통은 또 다른 나를 만들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다. 어둠의 공간에서 상상하는 허깨비는 망상과 창작을 넘나들었다. 지나친 감성은 도덕과 양심을 잊기도 했다. 소설도 수필도 그 무엇도 아닌 생각놀이에 빠져 밤을 잊었다. 동트는 아침 해에 밤의 요정들은 시나브로 사라진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는 낮과 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되는 가수 백설희가 불렀던 이 노래를, 60대 이상의 시인들이 역대 최고의 노랫말로 뽑았다는 기사를 보았다. 얼큰하게 취기가 올랐을 때 젓가락장단에 맞춰 불러야 맛이 나는 노래다. 하찮은 유행가 가사가 명시, 명언보다 감동을 주기도 한다. 떨림과 울림이 가슴을 바닥부터 후려치는 날 녹음에 밀려가는 봄빛의 그림자가 흔들린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늙는 게 아니고 익어가는 것이란 말은, 인품이 잘 익은 노년을 두고 하는 말이다. 노년의 향기는 홍차를 닮았다. 헐렁한 삶 속에서 자연과 우주를 품어 볼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그리운 사람들이 더 그리운 날이 있다. 적당한 외로움과 그리움은 마음의 지경을 넓혀 준다. 차 한 잔에 마음의 눈빛이 머무는 날이다.
여자 나이 50대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의 교차로다. 가족에 대한 의무나 과제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기억력과 집중력이 급격히 떨어지며 신체의 반란이 온다. 간혹 빈 둥지 증후군을 앓기도 하지만 묵은 된장처럼 깊어지는 나이이기도 하다. 가을빛으로 달리는 몸과 달리 언제나 봄빛인 마음의 부조화 속에서 원만한 마음 가꾸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신생아처럼 밤낮없이 꿈속을 헤매다 저승 잠이 이런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날은 달아난 잠을 쫓는 술래가 되어 밤새도록 숨바꼭질을 한다. 여러 곳에서 보내는 몸의 비명에 마음마저 허물어진다. 사춘기 아이마냥 감정의 기복을 숨기지 못하고 조증 울증을 넘나든다. 나 아닌 타인의 모습에 낯설고 혼란스럽다.
암각화를 닮은 초로의 여인은 세상을 두루 감싸는 나이다. 다소곳한 음전함도 매혹적인 향기도 나지 않는다. 걸쭉한 농담을 빚는 여인은 막걸리를 닮았다. 막걸리 여인에게서 상큼한 사이다와 달콤한 와인 맛만 기억하는 그 마음은 무엇일까. 낙엽 냄새 가득한 중년의 여인에게서 풀빛 신부를 그리는 그의 넋두리는 진행형 메아리다. 일상의 소소함에서 만나는 작은 들꽃과 풀꽃에게 사랑스런 눈길을 주는 나이도 중년이다.
그동안 뭣하며 살았던가! 욕심과 이상으로 치닫느라 정작 소중한 것을 잃지 않았던가. 가까이 낮은 곳에서 들리는 자연의 소리에 행복을 담는다. 나태주 시인은 풀꽃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자세히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보름달이 어둠을 삼키는 밤 서걱대는 댓잎 소리에 잠이 깼다. 외로워 서로의 몸을 비비는 소리라 했던가. 바람은 달빛을 사모하는 환쟁이 스토커다. 방문에 그려진 수묵화에 보름달 반달 초승달이 젖어든다. 문풍지가 수없이 흔들리는 밤, 난 그들의 밀어에 귀 기울인다. 어둠과 달빛 사이로 봄비가 내리고 사랑도 권력도 봄날처럼 그렇게 떠나간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목련꽃 / 이 선 (0) | 2020.07.22 |
---|---|
[좋은수필]들깨 밭에서 / 이채영 (0) | 2020.07.21 |
[좋은수필]장미가 있는 저녁 / 서미애 (0) | 2020.07.19 |
[좋은수필]맛과 멋을 담다 / 문선자 (0) | 2020.07.17 |
[좋은수필]자업자득 / 곽흥렬 (0) | 2020.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