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 내게 오기까지 / 남태희
사람들은 내게 왜 글을 쓰는지 묻는다. 아니 스스로 질문한다. 물음 끝에 얻는 답 가운데 첫 번째는 자연풍경이 글을 쓰게 했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북 울진이다. 하지만 기억이 시작되는 곳은 다섯 살 무렵 경북 영양의 수하계곡이다. 이후 다시 산 하나를 넘어 울진군의 왕피리로 이사를 나왔으니 수하계곡을 돌아 나온 강물이 왕피천이 되는 것처럼 깊은 숲과 머물지 않고 흐르는 강물을 보며 자란 사람이 글을 가까이한다는 것은 어쩜 강물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 싶다. 영양의 수하계곡과 울진의 왕피천이 내 유년의 시작이었음은 돌이켜보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교통이 좋아져 왕래가 쉬워졌지만 예전에는 등허리 굵어 손 안 닿는 곳이 울진이라고 했다.
울울창창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는 솔향을 품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벌목장에서 가끔 나무 찍는 소리가 들려왔고, 아버지는 복령을 캐고 송이를 따고 어머니는 나물을 뜯고 콩밭을 매셨다. 외딴집에서 친구도 없이 지내가 초등학교에 입합하면서 친구가 생겼다. 외딴잡에 살던 내가 십리 길을 걸어 학교에 갔다 올 때 바라본 왕피천의 해 질 녘은 알 수 없는 서글픔으로 기억된다. 무엇을 알 만한 나이도 아니었건만 나주 어릴 적부터 그랬던 것 같다. 초록 잎이 돋기 시작한 묏등에 올라 허리를 꺾어 도는 왕피천을 바라보며 미지의 세상에 궁금증이 일었다.
벽촌의 학교에는 책이 귀했다. 집에도 물론 책이 없었다. 천자문 한 권과 토정비결이 전부였다. 동화책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하고 처음 보았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아버지가 사 오신 『가정생활대백과』 한 권이 내게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그 책에서 처음으로 한국 시인들의 시를 읽었고 외국 시인의 시도 읽었다. 고흐의 ‘해바라기’ 나 ‘까마귀가 나는 밀밭 길’을,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이나 ‘풀밭 위의 점심식사’도 르느와르의 ‘검은 옷을 입은 소녀’도 그 책에서 처음 보았다. 긴 목에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은 하얀 공단 장갑을 끼고 있었다. 아마도 초대받을 때의 예절이나 화장법 등을 소개하는 부분이었던가 보다. 어린 나이에 수십 번도 더 읽은 그 책으로 웬만한 시를 모두 암송했고 또래보다 조숙했다. 아버지가 숨겨두고 보신 책이라 무슨 뜻인지 모르는 단어를 물어보지도 못했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제일 뒷장 ‘가정의례’에 가까이 있는 그림들 때문이었다. 남녀의 여러 가지 체위가 그려진 그림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 책을 금서로 여기게 만들었다.
어려운 단어들은 참 많았다. 노천명의 <사슴>울 앍을 때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놓은 족속이었나 보다’에서 ‘관’이나 ‘족속’의 뜻과 김소월의 <초혼>에서 ‘초혼’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가 늘 궁금했다. 박목월의 시 속에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하고 읊조릴 때 딱 맞아떨어지는 운율, 시 속에 풍기는 이미지들이 생생하게 느껴져 자꾸만 입속에서 웅얼거리곤 했다. 어쩌면 문학이라는 혼자만의 숨은 놀이는 아침 숲의 솔향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내 속으로 젖어 들었는지 모른다.
살면서 누구나가 겪는 고비들이 찾아왔다. 지금의 나이가 되니 혼자만 부닥치는 일이 아니란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학비를 못 내어 걸핏하면 불려가는 것은 참을 수 있었다. 나만 가난한 것이 아니었기에, 단지 좀 아팠을 뿐이었다. 일기장 가득 떠오르는 말을 긁적이면 시가 되는 듯도 했다. 한 권 한 권 노트에 빼곡히 무엇인가가 채워지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있는 밤들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학교폭력으로 동생이 정신병원을 드나들면서 소금자루에 물이 스며들듯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평소에도 바람처럼 떠돌던 아버지는 그 충격 탓이었던지 산속으로 아예 출가하고 말았다. 대학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던 현실, 어설펐던 결혼생활, 갓 백일을 넘긴 아들의 죽음은 내게 피를 토하는 아픔이 되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없는 듯했다. 나 아닌 누군가 자신의 처지를 토로한다 해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은 일에 무슨 호들갑인가 싶어 함께 눈물 흘려주기가 힘들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어느 날 거울 속의 나는 더 이상 울지 못하는 새가 되어 있었다. 건조하고 무력한 눈빛, 자존감을 상실한 어두운 민낯이 공포 영화 속 주인공을 보는 듯 무서웠다. 허물어져 내리는 흙벽처럼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던 나는 발견한 순간이었다.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폐허가 된 자신밖에 남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다섯 해 가까이 며느리로 어머니로 아내로 살던 삼십 대의 막바지 우연히 수필을 배우러 길을 나섰다.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도 모르고 덜컥 걸음마를 시작했고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듯이 4년 만에 등단하였다. 그리고 조금씩 속을 담은 글을 남들에게 내보였다. 처음에는 내가 적은 글은 글이 실려 있는 책을 전해주는 게 어찌나 힘들던지, 동인지도 수북이 쌓아놓고 주변 사람과 나누지 못했다.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좋은 스승을 만나 수필공부 십여 년 만에 첫 수필집 『수하에 가다』를 발간했다. 십여 년 동안 모은 글로 수필집을 냈더니 그동안 글도 그만 나이를 먹어버렸다. 수필집을 내어놓고 보니 글도 늙어가는구나, 느꼈다. 시절에 맞는 글을 알맞게 발표하는 것도 책임이구나 싶었다. 게으르다 질책하는 분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2008년 『수필문학』에 등단하면서 소감으로 적은 말을 줄여 옮긴다.
천사의 나팔꽃을 오늘 아침 우연히 보았습니다. 연노랑 큰 꽃을 보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중략)천사의 나팔꽃은 커다란 나팔을 땅을 향해 불고 있었습니다. 땅속까지라도 희망 한 줌을 전하려는 모습인 듯, 더 낮은 곳의 말을 들으려는 귀 기울임인 듯, (중략) 추천 완료 통지서가 도착했습니다. 순간 천사의 나팔꽃, 낮은 곳을 향한 목소리를 떠올렸습니다. 그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곳의 모습들, 불편하지만 현실인…
2014년 첫 수필집 『수하에 가다』 서문에는 이런 심정을 고백했다.
처음엔 혼자만 아픈 줄 알았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힘들게 하고 시름에 들게 한다고 탓만 했습니다.
어느 날 보니 더욱 병든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상처는 꾸덕꾸덕 말라 딱지가 앉아야 하건만 다시 또 뜯어낸 상처로 더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글을 공부하며 많은 이들의 안부가 궁금했습니다. 그들이 내게 준 상처 못지않게 내가 준 상처도 작지만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화해의 손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나쳐온 작은 인연들에게 비겁하게 속말을 합니다.
“그것조차 사랑이었음을 이제야 압니다.”
겨울 한밤중, 어린 가슴 한구석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칭얼거리다 마당으로 쫓겨난 적이 많았다. 울면서 쫓겨난 마당에 서면 밤새 내린 눈으로 세상은 온통 환하게 빛났다. 하늘에서는 별과 달이 빛나고, 먼 곳에서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살화목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내린 마당 가장자리에서 달빛보다 더 하얀 알궁둥이를 하고 앉아 오줌을 누었다. 언뜻 엉덩이에 닿은 눈의 쨍한 차가움과 발등에 튄 뜨끈한 오줌발, 상쾌한 바람의 냉기는 무서움을 극복할 만큼 참 따뜻했다. 배설의 기쁨은 달았다.
『수하에 가다』를 내어놓고 처음의 다짐처럼 당찬 글로 풀어낸 건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가족사의 아픔, 창밖으로 본 이웃의 서글픔이 소화와 배설의 쾌감에서 보편적인 공감대로 승화했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가끔은 나의 수필 속에 문학적 상상과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얼마나 담겼나 하는 부끄러운 심정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도 있었다.
그러는 즈음 계간 『수필세계』에서 특별기획 ‘우리 시대의 수필작가’에 글을 보내 달라고 연락이 왔다. 기쁜 마음보다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는 표현은 겸양에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때 나의 마음이 꼭 그랬다. 이제 지금보다 더 좋은 글을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꼭 그렇게 하라고 쟁쟁한 분들 틈에 어깨를 나란히 할 기회를 준 것이리라.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수필가로 여물어지고 싶다. 등단소감에서 밝혔듯 조금은 소회된 곳,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운 입김으로 풀어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누처럼 쨍하지만 포근하고 달빛처럼 고요하지만 두루 환하게 포용할 수 있는 글을 펼쳐내고 싶다는 생각에서 두 번째 수필집 『모서리의 변명』을 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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