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문학 / 맹난자
인간에게 문학은 무엇인가?
고해인가? 위안인가? 첫사랑과도 같은 설레임으로 다가왔던 문학, 그 열망도 나이 따라 시들해진 지금 나는 내 문학적 행보를 돌아본다. 왜 그랬을까? 전과자가 은밀하게 범죄현장을 찾듯 내 발걸음이 닿은 곳은 불우한 작가들이 숨진 마지막 장소이거나 그들이 묻힌 묘지였다. 모파상이 혼자 숨진 블랑쉬 박사의 정신병원, 보들레르가 눈을 감은 돔가街의 정신병원, 시인 네르빌이 목을 맨 파리의 어느 뒷골목. 다자이 오사무가 뛰어내린 다마가와 상류. 가와바타가 자살한 가마쿠라의 마리나 맨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자살한 다바타 435번지의 주소를 들고 동네 어귀를 몇 바퀴나 돌기도 했다.
내 안의 어떤 요소가 그들을 찾게 했을까?
그들의 자살과 고통의 의미를 내 몸에 문신으로 새겨 넣으면서 그들의 문학과 아픔에 동참하려고 애썼다. 나는 그들의 절망을 양식 삼아 내 슬픔을 치유하면서 인생을 쓰다듬는 버릇을 키워 왔다. 자살하지 않고 이만큼 둔하게 살아남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한동안 나는 아버지가 자살하실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마음 졸이던 때가 있었다. 인생 중반의 부당한 실직과 분노, 장남의 급사. 어머니의 심장마비. 서모와 삐걱거리던 삶은 파국으로 끝났고 요양소로 면회를 가면 '여차하면…." 하고 손으로 목을 긋던 아버지의 동작. 마음이 다급해지기도 했었다.
어느 날 신문에 난 '자살한 영혼은 죽어서 천당에도 못 간다.'는 김동리 선생의 기사를 오려서 급히 요양소로 부치기도 했었다. 긴 장마 중 폭우 속에 면회 간 날은 아버지가 초췌하게 병실에 혼자 계셨다. 같이 있던 H씨가 어제 죽어 나갔다며 '다음은 내 차례지….' 말없이 돌아 나오는 길, 마당에 줄지어 핀 과꽃들이 이상하게 영안실의 향냄새를 풍겼다. 세상이 곤두박질치듯 발밑이 어지러웠다. 아버진 자살한 일본작가 아리시마 다케오나 가와바타를 좋아하실 뿐 아니라 기질적으로도 상통한 데가 있어서 더욱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 무렵 고맙게도 두 동생들은 아버지가 그곳에 계시는 동안 서둘러 짝을 맺게 되어 그 힘으로 비티셨던 게 아닌가한다. 퇴원한 뒤 노년을 아들네 뒷방에서 몇 해를 더 계시다가 일흔 둘, 당신의 '정명定命'이라면서 편안히 생을 마감하셨다. 얼떨결에 이제 내가 그 나이가 되었다.
편안히라니? 그런 불경이 없다. 그분 심중의 빈 칸, 환과鰥寡고독이 되짚어진다. 책상에 늘어나는 자잘한 약봉지들. 파스, 소화제, 진통제, 비타민. 우두커니 책을 붙들고 앉아 계시던 모습, 때론 그것도 극기가 아니었을까? 그만 아득해진다.
유진오닐의 자전적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를 보고 온 날도 나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연극배우이던 오닐의 아버지는 아내가 해산할 때, 돌팔이 의사를 고용하여 아내 메리는 마약중독에 걸리게 된다. 모르핀이 떨어지자 견디다 못한 메리는 잠옷바람으로 뛰쳐나가 템즈강에 몸을 던지려 했다. 잃어버린 소녀시절로 되돌아간 그녀는 웨딩가운을 걸친 채 층계를 내려오며 혼자 중얼거린다.
"내가 여길 무얼 찾으러 왔지?"
연극을 보며 나는 내내 편치 못했다. 젊은 날, 아버지의 외도와 실직, 어린 동생들의 죽음, 심한 우울증으로 어머니는 다급하게 약을 찾았고 나는 히로뽕을 사기위해 삼선교에서부터 종로4가까지 울면서 걸었던 내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한 주먹씩 먹어야했던 파스와 나이드라지드. 폐병을 앓으며 그런 가족사를 눈물로 쓴 오닐의 고통에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다. 그의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늙은 채플린과 결혼한 외동딸과는 의절, 손자는 생후 3개월 만에 급사하고, 그 아이의 아버지인 장남의 자살, 연극실패, 소뇌의 세포가 퇴행하는 희귀병을 앓으면서도 그는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을 최선을 다해 기다렸다. 때로는 '왜 빨리 죽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소리치면서 울었다고 한다. 셸튼호텔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2년 가까이 그는 방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찰스 강이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방에서 안락의자에 앉아 강을 보든지 차량의 행렬을 지켜보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는 그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린다. 삶이 단조로워진 지금, 어둠이 오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문득 그의 심정이 되곤 한다.
십여 년 전, 나는 그들이 실제로 살았던 무대의 현장인 뉴런던의 '몬테크리스토 커티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해질녘, 그의 마당에 서서 밤을 맞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아픔을 넘어서려는 극복의 의지, 인간에 대한 증명이 아닐까?
문학은 인간의 나약함을 증거하고 약자의 패배를 이해하며 인간의 폭을 넓혀나가는 인생의 대 학습장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살은 쉽다. 그러나 삶을 살아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왜 빨리 죽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외치던 그의 말이 요즘 귓가에 맴돈다. 죽음이 올 때까지 고통 속에서 견딘 그의 인내를 곱씹어 보게 된다.
여기에 또 한 사람, 남다른 지혜와 문재文才가 있음에도 질곡된 운명으로 천 집[千家] 문전을 떠돌아야 했던 김삿갓. 자전적인 그의 <난고평생시> 마지막 한 줄이 요즘 부쩍 입에 붙는다.
돌아가기도 머물기도 어려운 나그네여
얼마나 길가에서 외롭게 방황했던고
지금도 눈을 감으면 안개가 짙게 낀 템즈 강가의 긴 무적霧笛소리가 내 가슴 위를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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