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더지 / 강돈묵
녀석들과의 조우는 작년 겨울부터다. 전혀 예기치 않은 녀석들의 출현이었다. 처음에는 흙무더기를 보고 들쥐들의 소행이려니 했다. 겨울잠을 자는 것으로 여겼던 두더지를 떠올린다는 것은 정말 무리였다. 김장배추를 뽑고 좀 부실한 것들은 봄채소로 먹겠다고 밭에 놔뒀는데, 어느 날부턴가 포기 사이에 흙이 모아지는 거였다. 배추 포기 사이로 도도록이 솟아오르는 흙을 바라보면서 별난 들쥐도 다 있다 싶었다.
봄이 되어 밭에 씨앗을 뿌리고서야 이게 두더지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겨우 알아차렸다. 흙을 편편하게 고르고 씨앗을 뿌린 다음날 아침 텃밭에 나가보니 녀석들은 활개치고 다닌 흔적들을 남겨놓았다. 마치 가을하늘을 가로질러간 비행기 흔적처럼 길이 나 있었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놈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새벽부터 남새밭에 나가 두더지를 기다리시던 아버지의 옆엔 으레 내가 있었다. 수선 피우는 나를 쫓기 위해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셨다. 어쩌다 녀석을 잡은 날이면 아버지는 개선장군처럼 밭에서 나오셨다. 그리고는 잡은 두더지를 시뻘건 아궁이불에 구워서 자식들의 입에 넣어주셨다. 밤눈이 밝아진다는 명목이었으니,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새 집을 짓고, 나머지 땅에 성토를 하여 텃밭을 만들었다. 텃밭임을 유념하여 좋은 흙을 부어주었으면 좋으련만 자갈이 태반인 흙을 부려놓았다. 항의하자 일하는 사람은 장비를 들여 돌을 골라내겠다고 나를 안심시켜 놓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어쩔 수 없이 한 해 동안 돌멩이를 주워내고 퇴비를 쏟아 부었다. 얼마 후 지렁이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지렁이는 식물질 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부식토를 취하게 되는데, 그 때에 흙 속에 박테리아를 배양하게 되어 작물에 가장 좋은 토양을 만든다. 그러니 텃밭이 이제는 남새밭으로 태어난다는 징조였다. 날이 갈수록 밭에는 지렁이의 수가 늘어갔고, 여기저기 지렁이 똥이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두더지가 나타난 것이다. 녀석은 돋아난 새싹의 뿌리를 허공에 띄워 착근을 방해했다. 싹을 밀어올린 작물들을 말라죽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서서히 아버지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새벽부터 남새밭으로 나갔다. 손에 삽을 들고 녀석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숨죽이며 기다리니, 녀석이 나타났다. 순간 다가가 삽으로 녀석이 있는 곳을 파 던졌으나 허사였다. 녀석은 없었다. 간 곳이 없다. 참으로 귀신같은 놈이다. 여러 차례 녀석과의 긴장이 있었으나 매번 나의 패배로 끝났다. 몇 차례 실패 끝에 두더지는 뒤로 도망치는데 명수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두더지가 나타났다. 녀석이 가고 있는 방향의 뒷부분을 공격했다. 적중이다. 내가 흙을 파서 내던지자 그와 함께 두더지도 내팽개쳐졌다. 땅에 떨어지자 둥근 몸통을 좌우로 비틀며 도망을 시도한다. 녀석을 때려잡고 한참을 바라본다. 그 비단결 같은 털, 짧은 다리, 넓은 발바닥, 뾰족한 주둥이. 틀림없이 어린 날 보았던 두더지다.
밭에는 두더지가 더 있었다. 지난해에 새끼를 친 모양이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결국 나는 매일 아침 녀석들과 전쟁을 치르는 의식을 가져야 했다. 이 일은 한 달을 두고 진행되었다.
일상에 지쳐서 이제는 모두 포기해야겠다며 사무실에서 나온 날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린 비로 동네 입구 식당은 사람들이 그득했다. 나도 같이 술에 절었다. 세상의 걱정은 다 짊어지고 술집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비는 그쳤고, 남새밭 앞에 서니 두더지 자국이 내 근심걱정처럼 여기저기 엉켜 있다. 작물을 다 뒤집어 놓았다. 왜 하필이면 녀석들은 내 밭에만 찾아올까. 옆 밭은 파종하지 않아 마구 뒤집고 다녀도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굳이 죽음을 무릅쓰고 내 밭으로 오는 까닭이 무엇일까. 지렁이였다. 그들의 선호 먹이인 지렁이가 많기 때문이었다. 퇴비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묻으면서도 농약을 치지 않아서 지렁이가 부쩍 늘어난 탓이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두더지. 지향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저들을 나는 왜 무너뜨리려고만 했을까.
두더지보다 열심이지 못한 자신이 보이면서 문득 부끄럽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조그만 장애가 있어도 이내 포기하고 마는 나와는 달리, 치열한 살이 저들에게는 있지 않은가. 제 가족이 벌써 몇이나 목숨을 잃었는데도 그들은 그 위험지역을 끝까지 고집하며 공격을 시도하고 있다. 큰 수확을 위해서는 그만큼 부담이 따른다는 것도 그들은 안다.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면 기꺼이 목숨도 걸며 달려드는 저들의 용기에 비하면 나는 참으로 허우대만 큰 미미한 동물이다. 그들 앞에 나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작은 미물인 것이다. 조금 전에 마신 술이 화들짝 놀라며 역류한다.
음식물 쓰레기에서 간기를 뺀 나는 그들의 은거지인 바윗돌에서 가장 가까운 옆의 밭에 묻었다. 그리고 내 밭에 있는 지렁이를 수집하여 그곳으로 이주시켰다. 바윗돌에서 음식물이 묻힌 곳까지 흙을 일구면서 나는 이 음모가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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