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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십일월 어느 날 / 고공희

십일월 어느 날 / 고공희

 

 

 

거대한 사이프러스 나무 앞에 섰다.

그 위풍당당한 위용에 넋이 빠져 있는데, 일행 중에 막내인 초등학생이 "빼빼로 나무다." 하고 소리쳤다. 길고 가늘기만 한 과자와는 달라 보이는데또래들은 그렇게 부르는 걸까, 둥그렇게 퍼진 아랫도리의 너른 품과 위로 갈수록 오므라든 형태를 싹 축소시키면 내 눈에는 고깔모자와 흡사해 보인다. 하늘로 쭉쭉 뻗은 키에 못잖게 몸피를 부풀린 나무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개를 치켜드니 뾰족한 끝이 파란 하늘에 묻혀 아스라하다.

초록 블록을 끝없이 세워 놓은 것 같은 자태와 옷깃을 스치는 바람에도 한 점 흔들림 없어, 정물이다. 하늘과 이어지고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하나 되어 일렬로 늘어선 초록 군상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고즈넉한 길과 함께 아득해지면서, 결국은 하나의 점으로 남는다.

한 번 베면 다시 자라지 않는 나무, 말라 죽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 이집트인들의 오벨리스크(고대 이집트 왕조 때 태양신을 상징으로 만들어진 기념비) 같다고 했다. 40에서 45미터까지 자라는 상록 침엽수로 단단한 껍질만큼 생명력도 질기고 강하다. 지중해 지역에서 서식하며 동부인 섬나라 키프로스에서 숭배했다 하니 사이프러스 그 이름 역시 키프로스에서 유래되었단다.

강인한 본성을 지녔다는 이 나무는 지하 무덤 위에서 흐트러짐이 없다. 모진 바람에 휘둘리면서 대처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 수용하면서 깊어진 걸까. 하늘과 땅을 이어 주는 것 같은 장엄한 나무가 작은 떨림도 없이 평온하여 의연하기까지 하다. 나무를 감싼 가을 햇살이 외려 애잔하다.

하늘 가까이 가고 싶은 신앙인들의 애절함을 품고 더 이상 뻗어 내릴 수 없는 지하 무덤을 대지 삼아 허리를 꼿꼿이 세운 나무. 하늘을 향한 모습이 인간과 신을 이어 주기 위한 중간 역할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방으로 뻗어나간 뿌리 밑으로 감추어진 지하 세계는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 지하묘지다. 1층에서 5층이 넘기도 하지만 총길이는 로마 전역에 900킬로, 너비는 상상 그 이상을 뛰어넘는다고 한다.

로마 귀족들은 화장을 했지만 일반 시민들의 주검은 땅에 매장하면서 지하 무덤이 만들어졌다. 죽음 그대로의 부활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지녔던 기독교인들은 시신을 훼손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있는 그대로 지하 동굴에 안치했다. 기독교인만 아니라 로마 시민과 성인들의 무덤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심한 박해 아래서 가장 완벽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피신처였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고 음습한 통로를 두고 사방으로 퍼져나간 미로 동굴, 몹시 울퉁불퉁한 통로를 따라 가니 시신이 묻혔던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우리가 볼 수 있던 곳은 동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13명의 교황들이 매장되었으며 현재도 발굴 작업을 하고 있지만, 지하 무덤의 원형이 온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라 한다.

문득 반 고흐가 떠오른다. 밀밭이나 산을 배경으로 사이프러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그림이다. 그에게 지독한 가난과 뼈를 깎는 외로움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그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루하게 사느니 차라리 열정 속에서 살겠다.'는 화가의 열정은 그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과 사이프러스 나무에서도 나타난다. 발작 증세가 있는 그에게 위안을 주는 희망과 같은 존재였고 동시에 죽음과 슬픔을 상징하면서, 역설적으로 비참한 현실에 대한 울분도 축축이 배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속 사이프러스는 기류를 탄 듯 강한 붓 터치에 의해 살아 움직이고 꿈틀대며 소용돌이치고 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의 깊이를 품고 강력한 생명력으로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구친다. 타원형 나무들이 주는 안정감, 편안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바람과 햇빛을 받아내며 뻗어 나가려는 생동감이 강렬하게 머릿속에 각인된다.

자연으로 승화시킨 그림 속 사이프러스와 지하 묘지 위를 오랜 시간 지킴이로서의 아우라가 풍기는 두 사이프러스, 특별함으로 서로 다른 듯 같아 보인다.

하지만 신과 인간의 사이를 이어 주는 나무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는 확신을,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에 섰을 때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