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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꽃종이 울다 / 정복언

꽃종이 울다 / 정복언

 

 

 

댕그렁, 댕그렁.

환청이 아니다. 종소리가 맑은 얼굴로 다가와 가슴에 안긴다. 어떻게 휘둘리지 않고 소음의 늪을 지났을까. 덜컹덜컹 일상을 밀고 가는 목소리, 가쁜 숨을 토해 내는 자동차 엔진 소리. 온갖 소리가 뒤엉켜 침묵을 몰아내는데, 영혼을 일깨우듯 종소리가 퍼지고 있다.

제주시 중앙성당 종탑에서 아침저녁 6시에 울리는 종소리는 부활의 그리움이다. 종소리마저 소음이라며 민원의 대상이 되어, 학교나 교회의 종들이 숨을 멎을 때 함께 눈 감았던 종이 살아났다. 지역민들이 종소리의 추억이 그리워 되살린 것이다. 잠시 귀를 열면 수많은 언어로 메마른 가슴을 적시리니.

사람들만 종을 매다는 게 아니다. 자연도 종을 매단다. 하얀 소리를 울리며 마음으로 듣게 하는 영성의 종이다.

마당의 분재 군락 속엔 종낭 분재가 하나 있다. 종낭이란 때죽나무를 일컫는 제주어이다. 다섯 개의 하얀 꽃잎이 아래를 향해 벌어지면 마치 종을 닮아 붙여진 이름일 테다. 여러 해 전 멀리 강원도의 한 분재원에서 내게로 이사 온 종낭은 고향이 그리운 듯, 5월 초면 하얀 지등을 주렁주렁 달아 놓는다.

대부분 꽃은 하늘을 우러러 마음을 여는데, 종낭꽃은 눈 아래 땅을 굽어보며 가슴을 연다. 마치 하늘의 소리를 전하는 경전 같다. 꽃이 지면 작은 열매가 탄생한다. 그때부터 비바람으로 수행하며 완성의 길로 나아간다. 고작 손톱만 하게 조롱박 모양으로 자라는 열매는 낯빛이 연회색이다. 어찌 보면 진리의 소리가 응축된 종주머니 같기도 하다.

봄 햇살 내리는 오전, 마당으로 나가 종낭꽃과 눈을 맞춘다.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듯, 꽃향기가 나를 에워싼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저 하얀 순수, 고통을 수용하면 저리 아름다울까.

댕그렁, 댕그렁.

하얀 꽃종이 운다. 가식이나 왜곡이 없는 종소리다. 꾸미지 않고 희로애락을 토해 내고 진리를 설파한다. 찰나를 노래하고 때론 긴 서사를 풀어내기도 한다. 소통의 달인이며 언어의 마술사다. 살포시 지상으로 내려오는 천상의 소리, 눈으로 보며 전율한다.

울지 않을 수 있으랴. 살아 있는 것은, 아니 존재하는 것은 종처럼 몸으로 울어야 한다.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산과 바다가 울고 꽃과 나비가 울며, 소리들이 모여 화음이 되고 종국에는 소실해 침묵이 된다.

종은 구도자다. 긴 시간을 침묵으로 묵상하다 깨달은 진리를 울음으로 전한다. 내면을 때리는 고행의 소리, 그에 사람들은 무릎을 꿇는다. 가슴마다 은은하게 흐르는 여울은 본향으로 인도하는 순례길인가 싶다. 나는 자연에서 신의 메시지를 듣고 영혼의 구원을 꿈꾸곤 한다. 필요 없이 생겨난 게 무엇일까. 무질서하게 보이는 만상의 것들이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실존을 증명함임에랴. 오래 바라보노라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서도 무한한 신비와 아름다움이 튀어나온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리를 숙이게 된다.

내 몸에도 종소리가 들어 있을까. 공명을 꿈꾸는 맑은 소리. 그래서 어느 날 종 줄을 당기면 내 일생의 소리가 은은하게 퍼질까, 아니 둔중한 소리라도 나기나 할까.

꽃종을 바라보며 다채로운 소리에 몰입한다. 침묵의 건반을 오르내리는 생의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