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크레송 / 류창희
“안녕하세요? 저는 큰옷 사서 줄여 입는 아줌마예요.” 전화하니 다 되었다고 찾아가라고 한다.
나는 옷을 무조건 큰 것을 산다. 결혼하면 살이 찐다기에 아이를 낳으면 더 찔 것 같아서다. 지금은 나잇살을 대비하여 일부러 큰 것을 산다. 그 덕분에 옷이 작아서 입지 못하는 경우는 드물다. 또 누구를 주려고 해도 이삼십 년 유행은 지났어도, 왕년에는 제법 주름 잡힌 족보가 있는 옷들이라 안방마님의 복식으로 장롱을 지키고 있다.
가끔 꺼내어 소매를 떼어냈다가 도로 붙였다가 레이스로 나풀거리게도 해보고 별짓을 다 내본다. 그러나 나의 솜씨라는 것이 버젓한 옷 한 벌이 되는 적은 드물다. 그 짓도 돋보기 끼고 바늘귀 꿰는 것이 귀찮아 뜸해졌다. 그보다는 요즘 알맞은 수선집을 찾았기 때문이다.
아파트 상가 안에 서너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다. 벽 쪽에는 재봉틀이 있고 문 쪽에는 다리미 대가 있다. 자 가위 바늘 실 다리미 인화 낭자 감투할미 규중(閨中)칠우들이 다 모여 있다. 수북하게 쌓아놓은 일감, 수선을 마쳐 걸어놓은 옷, <뉴패션>을 선도하는 디자인 책 서너 권 등. 좁은 공간이지만, 한 자락 천만 잡아당기면 금세 간이탈의실까지 만들어낸다. 그 틈새 라디오의 ‘싱글벙글 쇼’까지 틀어놓으니 음향까지 다 갖춰진 셈이다.
그 안에 사십 대쯤으로 보이는 남녀가 둘이서 일을 한다. 아침에 금방 논에 물꼬를 트고 들어온 듯한 구릿빛 피부의 아저씨와 찔레순이나 꺾어 먹고 놀았음 직한 머리를 질끈 동여맨 그렇다고 결코 아가씨는 아닌 소박한 여인이 있다.
어느 날,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옷 운동화 가방수선 찾아가세요 -끄레쏭-’ ‘끄레쏭’, 어디서 들어본 듯한 단어다. “와아~!” 이름이 그럴싸하다. 순간, 수선집 정경이 떠올랐다. 잡동사니가 가득한 공간, 오래전 추억 속의 그림이다. 나는 예전에 ‘화실’이란 간판만 봐도 데생용 석고상 앞에 앉아있는 나를 상상하곤 했었다.
나도 한때는 *크레송(CRESSON)을 꿈꿨었다. 중학교 다닐 때다. 교복도 모두 맞춰 입던 때라 길음시장 골목에도 고만고만한 양장점이 꽤 많았다. 이집저집 기웃거리며 유심히 보고는 빈 종이만 보면 옷을 근사하게 그렸었다.
아마, 이 아저씨도 옛날 ‘앙드레 공’이셨던 공자님의 후예였던가 보다. 디자인 원칙이 철저한 장인 정신이 강하다. 까다롭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느 소도시쯤에서 순종적인 미싱사 아가씨와 함께 ‘끄레쏭’ 양장점을 운영했었던 모양이다. 수선하고 남은 천을 달라고 하면, 꼭 신문지로 오려놓은 옷본을 꺼내 보여주면서 한마디 한다. “아줌마처럼, 아무따나 자르는 것이 아닙니다.” 손님인 나를 나무라는 것을 보면 그는 아직도 잘나가던 끄레쏭 시절을 그리워하는 듯하다.
수선집 아줌마는 “뭐하러 그 옷본은 보여주느냐?”며 남자에게 매번 퇴박을 준다. 내가 생각해도 기껏해야 치맛단이나 허리 품 조금 줄이는 일에 옷본까지는 필요할 것 같지도 않다. 옷본은 끄레쏭 디자이너의 자존심일 뿐이다.
나는 이때나 싶어, 전문가는 역시 다르다고 추켜세웠다. 그런데 대답하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건조하다. 두 사람의 오가는 말 땀 수가 촘촘하다. 섣불리 참견하다가는 내가 바늘에 찔리겠다. 그래도 눈치를 살피며 수선비를 좀 빼달라고 하니, 우리 아저씨에게 말해보라고 한다. ‘우리 아저씨’라는 말에 나는 얼른 부부냐고 물었다. 올 때마다 두 사람이 하도 다정스럽게 이야기를 해서 부부가 아닌 줄 알았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말 같지 않다는 듯 방금도 작은 일을 가지고 대판 싸웠다는 것이다.
왜 싸우지 않겠는가. 공간이 좁기 때문이다. 부부는 한 차만 타도 티격태격한다. 나도 엊그제 1박 2일 산수 좋은 곳에 여행 다녀오면서 승용차 안에서는 화를 꾸욱~ 참다가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도착하는 순간, 뒤도 안 돌아보고 내짐만 챙겨 들고 휑하니 들어왔다. 하물며 서로 얼굴 마주 보며 삼백예순날 밤낮으로 꼭 붙어 있으니 여북하겠는가.
“부부는 다 작은 거로 싸워요. 큰 거로 싸우면 애인이죠. 애인은 너 없이는 못산다고 생사(生死)를 가지고 싸우지, 누가 오줌 눌 때 변기 뚜껑을 ‘올려라. 내려라’를 가지고 싸우겠어요?”라며 열 받은 부부 사이에 끼워 들었다.
내 말에 힘을 얻은 아저씨는 내가 마치 제 누이라도 되는 듯 일러바친다. “지금도 저 사람이 그까짓 실 가지고…”. “또, 또, 또… 손님 앞에서…” 아줌마 눈빛이 아저씨에게 활시위를 당긴다. 두 사람 다 팽팽하다. 가위에 손대지 않아도 실이 끊어질 판이다.
“그만들 하세요. 예로부터 결혼할 때, 왜 함에다 청실홍실을 넣어주었겠어요. 다 집집마다 실가지고 밤새도록 붉다 푸르다 사랑싸움하라고 넣어주는 거예요.”
나는 공손하게 두 손을 맞잡고 ‘청실~ 홍실~’ 한 올 한 올 음률을 탔다.
‘청실홍실 엮어서 정성을 들여 / 청실홍실 엮어서 무늬도 곱게 / 티 없는 마음속에 나만이 아는 음 음 수를 놓았소 ♬’
어설픈 내 노랫가락에 싱글싱글싱글 벙글벙글벙글 신이 난 끄레쏭 부부, 내게 수선비 오천 원을 깎아줬다.
* 크레송(CRESSON): 창조(CREation) +열정(paSSion) +패션(fashiOn)이라는 최신패션주자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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