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역 풍경 / 허정자

역 풍경 / 허정자

 

 

 

2월의 중순임에도 추위는 한겨울 같았다. 목덜미로 파고드는 칼날 같은 바람을 막으려고 외투의 깃을 끝까지 올려보지만 춥기는 마찬가지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를 억지로 펴가며 추위를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추위쯤은 아랑곳없다는 듯 우렁한 남자의 목소리가 역 광장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을 믿어 천당으로 가도록 합시다.'

기차를 타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서울역 대합실로 향하던 나는 힐끗 소리 나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평소 때 같으면 길가다 흔히 만나는 기독교인의 전교려니 여기며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고나 할까. 왠지 그 소리 나는 쪽이 궁금해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마주 내려다보이는 역 광장 모퉁이에 임시로 조립한 듯한 푸른 천막이 보였다. 그 안쪽으로 오렌지색 조끼를 똑같이 입은 남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추운 날, 길 위에서 저렇게 큰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떤 눈빛일까. 천막 밖으로 혼자 나와 마이크를 잡고 있는 중년 남자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바쁘게 오가는 행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건만 엄숙한 모습이다. 열심히 길 위의 (노상) 전교를 하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때였다. 전교하는 그들보다 더 강하게 내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순간 나는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기차를 타야 한다는 것조차 잊은 채 내 목적지와 반대방향에 있는 그들 쪽으로 걸음을 재빠르게 옮겼다. 열심히는 아니지만 나는 불교신자다. 그런 내가 무슨 자석에 끌리듯 이쪽으로 오게 된 것은 전교하는 그들보다 그 앞에 있는 노숙자들 때문이었다.

노상 전교하는 곳에서 가까운 거리의 한쪽 길바닥에 빙 둘러 앉아 있는 노숙자들. 헝클어진 머리칼에 때 묻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때가 낀 더러운 손으로 술잔을 따르고 있는 늙은 남자와 낡은 모자를 거만하고 소주잔을 받고 있는 젊은 남자를 비롯한 일곱 명의 노숙자들-. 그들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주었다.

노숙자세계는 이런 것인가. 나이에 관계없이 힘센 사람이 우두머리로 서열이 정해져 있는 것인가. 늙은이가 젊은이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소주잔을 따르던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언젠가 아침 일찍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였다. 역 승무원에게 멱살이 잡힌 채 질질 끌려 대합실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던 노숙자를 보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마음이 아프던 기억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냉기가 올라오는 차가운 길바닥에 앉아 찬 소주를 마시며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아픈 추억 속으로 그리워도 만나지 못하는 가족을 생각할까. 아니면 바람처럼 떠돌아야 하는 슬픔과 가슴 아픈 사연을 담은 채 무거운 현실을 술로 잊으려는 것일까? 조각난 나무토막으로 꺼질 듯한 불씨를 피워놓고 한기를 달래며 둘러앉아 있는 노숙자들.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꿈을 잠재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마주서서 목청을 돋우며 전교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묘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저토록 열심히 전교하는 기독교 교인들.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저 불쌍한 사람부터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일까? 또한 노숙자들은 저렇게 열심히 외치는 목소리에 귀기울여 마음의 안식과 행복을 찾을 수는 없을까. 그들의 너무 다른 모습은 내게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 의문은 지워지지 않았다.

삶이란 무엇일까. 풀 수 없는 화두가 가슴을 무겁게 하는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