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을 들으며 / 정복언
죽음은 침묵이다. 다시 세상으로 소리를 낼 수 없다. 어디론가 흩어졌을 생의 소리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은 산 자를 비추는 등불일 것이다.
생리작용을 위해 몸이 깊은 잠을 흔들었다. 새벽 세 시쯤에 눈을 뜨니, 멈췄던 기계가 돌아가듯 감각기관이 살아난다. 이중창을 뚫겠다는 바람의 아우성이 야멸치다. 누구에게나 격정의 시간은 있게 마련인가. 마당으로 나서니 흥분한 바람이 마른 제 가슴을 두들기며 분탕질이고, 별이 없는 희뿌연 하늘은 이런 모습을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다.
아픈 배를 살살 문지르듯, 시간은 마음을 다스리는 손인가 보다. 아침 공간에는 바람이 순해졌고, 는개가 대지에 봄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우산 받쳐 들고 조신하게 대문을 나선다. 튀어 오를 빗방울이 아니지만, 사분사분 걸어야 소리들이 다가올 듯하다. 눈이 즐길 만한 풍경이 펼쳐져 있지 않으니 귀라도 활짝 열어야겠다.
어디서 읽었던 글의 작은 얼개가 떠오른다. 몸이 천 냥이라면 눈은 팔백 냥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귀가 눈의 형이란다. 듣고 보도 못한다는 표현에서도 그렇고, 안과라는 단과반장보다는 이비인후과라는 복합반의 반장이 위라는 것이다. 그뿐인가. 눈은 뒷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귀는 사방의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아닌가.
인체의 모든 기관은 고유한 기능이 있을 터, 특히 오감이라면 그 경중을 가릴 수는 없다. 어느 것이나 제 기능을 잃으면, 불편을 넘어 삶의 생기까지 말라 버리게 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야 하듯, 나는 약한 청력의 불편을 견디며 살고 있다. 돌발성 난청으로 몇 차례 며칠씩이나 병원을 드나들었고, 한평생 이명을 벗하고 있다. 젊은 시절, 예비군 훈련을 받으며 귀마개 없이 M1 소총으로 사격을 하다 총소리에 놀라 귀가 기절해버린 것이다. 그 후론 귓속에서 매미 소리가 계속 울어대는데 피할 방도가 없었다. 몰래 도망치려면 이내 그림자처럼 따라오고, 을러대면 아기처럼 칭얼대고, 세상에 이런 찰거머리가 따로 없다. 관심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던가. 살기 위해서 사랑을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귀 울음에 철저히 무관심해져야 한다. 그것이 내게 최선의 처방이다.
산책길에 자주 만나는 풀 한 포기 담돌 하나도 친숙하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외진 길을 돌아가다 자장에 끌리듯 걸음이 멎는다. 이럴 수가. 커다란 벚나무가 토막토막 잘려서 푸른 피를 토하고 있다. 나무들도 이런 경우를 운명이라 부를까. 어제까지만 해도 싱싱한 체구를 자랑하며, 머지않아 하얀 꽃들을 푸지게 선사하겠노라 약속했는데….
벚나무는 감귤 창고의 입구 한쪽에 자리하며 청색 강철판 지붕보다 높이 자랐었다. 비대한 체구가 주변에 그늘을 드리워 귤나무에도 피해를 주었던 것일까. 아니면 창고에 드나들며 작업하는 데 지장을 주었을까. 주인의 심중을 헤아릴 수가 없다.
밑동 지름이 50센티쯤 자라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난을 이겨냈을까. 그루터기에는 세파를 헤쳐 온 삶의 기록이 나이테로 남아 있다. 들쑥날쑥한 등고선 모습으로 사위의 풍상을 가늠해 본다. 사람처럼 나무도 거센 풍파에 맞서는 곳이 앞일 것 같다. 거목의 꿈을 키우려면 역경을 향해 오감을 열어야 할 테다. 고통과 슬픔을 향해 눈 뜨고 귀 열며 고뇌하고, 몸을 근육질로 단련하며 직립의 의지를 키워야 한다.
쌓이는 풍상으로 삶의 결을 넓히며 하늘 우러를 만큼 성장했는데 사람의 손에 명줄을 놓게 되었다니. 화사한 꽃으로 봄을 노래하려던 포부도 한순간의 허망한 꿈이었구나. 그루터기에서 묵언의 묘비명을 읽는다. ‘사람에게 맞서지 마라. 그는 망나니 춤사위를 즐기며 악기처럼 기계톱을 켠다. 종족의 혼을 잃지 않고 여기 벚나무 한 그루 순박하게 살다 가노라.’
오래전 학생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할 때 국립중앙박물관을 견학한 적이 있었다. 전시실을 들렀을 때 첫눈에 이게 무슨 작품들이랴 의아해했었다. 높은 벽면에 못을 박아 하얀 광목을 길게 두 줄로 늘어뜨린 것과 철사를 이리저리 뒤틀려 걸어 놓은 것, 상자에 모래를 가득 채우고 가운데 발자국 하나를 찍어 놓은 것도 있었다. 작품명과 작가의 이름표가 딸린 것을 보면서 내심 초등학생도 이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었다. 사진 같은 구상화에 박수를 보낼 정도였으니 나의 감상 수준이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리게 된다. 보고 듣는 만큼 알게 되고 그 범위는 넓어지고 깊어질 테다. 얼마 전 신문 기사를 보며 39광년 떨어진 곳에 멋진 신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트라피스트-1’이라는 별과 7개의 행성을 소개하고 있었다. 상상으로 닿기 힘든 우주의 광활함, 그 속의 무수한 신비로움을 생각하니 나는 어떤 존재일까 자문하게 된다.
관조하는 마음으로 사물들을 대하니, 새로운 의미의 색깔과 율동과 소리를 접하게 된다. 나이 들수록 온몸으로 오감을 키울 수 있음은 노년의 축복일 듯싶다.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다 떠나간 생을 그려 보며 그것들이 남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삶과 죽음의 순환으로 자연은 영원히 숨 쉬는 게 아닐까.
침묵은 새로운 소리를 담는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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