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離巢)와 귀소(歸巢) / 조이섭
아파트 베란다에 둥지를 틀었던 새끼오리들이 이십 층이나 되는 높이에서 과감하게 뛰어내린다. 다행히 119 구조대의 도움으로 가까운 강기슭에 무사히 안착한다. 이제 새끼들은 저들의 세상인 강물에서 어미에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자라 때가 되면 독립할 것이다. 그리고 짝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알을 낳아 품고 부화 시켜 새끼의 이소를 이끄는 어미가 될 것이다.
인간도 이소를 한다. 다만, 엄마의 품을 떠나는 ‘자립’의 의미를 어디에다 두고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인간의 이소’ 시기에 대한 해석이 분분할 것이다. 젖을 뗄 때, 걸음마 할 때, 숟가락질할 때, 초등학교 입학이나 대학에 들어갈 때, 취직해서 떠날 때, 결혼했을 때, 경제적으로 자립이 가능할 때 등 자식의 손을 놓은 시기는 집집이 환경과 성향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이소와 함께 동물은 자기가 살던 집이나 둥지로 되돌아오는 귀소본능(歸巢本能)도 있다. 꿀벌, 개미, 비둘기, 제비 따위가 대표적인 동물이다. 순환하는 자연이야 말할 것이 있으랴. 밑으로만 흐르던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태양의 열기에 춤추듯 올라와 운무로 머물다가 비가 되어 높은 멧부리를 적시지 않는가.
인간도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다. 바람피우던 남정네가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을 때의 아내(糟糠之妻; 조강지처)에게 돌아오는 것이나 자식이 부모가 되어보아야 부모 마음을 알게 되는 것도 마음의 귀소가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우리의 일상은 이소와 귀소는 반복이다.
아침에 집을 떠나 생업에 종사하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것은 하루라는 시간과 머무는 공간의 변화에 따른 이소와 귀소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정월 초하루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해서 섣달그믐을 맞이하는 것도 시(時)와 공(空)을 아우르는 일 년 단위의 그것이다. 그믐날에 잠시 마음이 들뜰 뿐, 어제와 똑같은 태양이 뜨면 다시 이소하여 일 년 동안 저마다의 노래를 부르다가 돌아온다.
우리는 끝없이 이어진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이소와 귀소를 되풀이하지만, 오선지의 되돌이표처럼 똑같은 멜로디를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빠르기도 다르고 곡조도 다르다. 해마다 똑같은 노래를 부르면 세상사는 재미가 무에 있으랴.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삶을 살다 보면 따분하다 못해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다행히 인간의 이소와 귀소는 가는 길이 다르고 오는 길도 늘 다르다. 그래서 떠날 때는 앞이 보이지 않아 두렵고 되돌아서려면 아쉽다. 그러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연례행사처럼 저지르고 길든다. 오래전에 왔던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데자뷔를 겪으면서도 쉬 잊어버린다.
이소와 귀소를 한 번 겪을 때마다 가치관이 바뀌고 인격이 변한다. 나사못이 한 바퀴 돌 때마다 골만큼 깊어지는 것처럼 연륜(年輪)이 쌓이는 것이다. 연륜이 많아진다고 무한정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연륜은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나사못이 어느 정도 박히고 나면 헛돌듯이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멈춘다. 미래보다 과거가 더 많이 보이게 되면 그때부터 시간과 사건을 집적은 하되, 집착해서는 안 된다. 지나간 시간을 깃털보다 가볍게 내던질 줄 알아야 한다. 다가오는 새로운 시간, 내일을 받아들일 여유를 위해서다.
오늘이 지나면 그 오늘은 오늘이 아니다. 어느새 내일이라는 놈이 오늘의 의자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로 이름을 바꾼 내일은 어제로 변하고, 하루가 지나면 엊그제가 되어 멀어진다. 내일은 이렇겠지 어제 생각한 일도 오늘 대부분 바뀌는 것이 세상일이다.※다만 우리의 눈이 어두워 그것을 보지 못하고, 마음은 닫혀있어 그것을 알지 못한다.
인생은 뫼비우스 띠 위에서 유랑과 정착, 출발과 도착을 무한 반복한다. 우리는 모두 새해 아침에 부푼 희망을 품고 떠나지만, 한 해가 저무는 날에 영광과 보람을 지고 돌아오는가 하면 오욕(汚辱)을 잔뜩 안고 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들떠 자만하거나 고개 숙인 채 포기하면 안 된다. 오늘의 끝은 또 다른 내일의 시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앞뒤가 연결된 하나의 길은 언젠가 끊어지고 말 테지만, 그것은 사람의 소관이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 타고난 운명이라 여기며 하염없이 걸어갈 따름이다. 그리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진다.※
노자는 도를 도라 하면 참된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참된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道는 곧 진리(眞理)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어떤 ‘모양’이나 ‘형상’에 있지 않으며, 시간의 연속 선상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오늘의 일상(日常)에 진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같되, 같지 않은 무한 반복은 허용하되 날마다 나사못과 같은 생성적인 삶을 살라 강조한다.
닭은 해거름이 되면 모이 활동을 그치고 횃대에 오른다. 쪼그리고 앉아 주위를 살핀 다음 날개깃에 모가지를 파묻고 잠이 든다. 명징한 목청으로 내일 새벽을 알리기 위해서다. 나도 새해 아침마다 손톱만큼이라도 더 밝게 깨닫는 개안(開眼)을 바라며 이소했다. 지혜를 일깨워 여는 개심(開心) 한 조각을 얻으려고 일 년 열두 달을 호미 한 자루 쥐고 헤맸지만 언제나 빈손으로 귀소했다.
올해도 새로운 이소를 위해 뫼비우스 띠 위에서 들메끈을 고쳐 맨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절대자께서는 해마다 소득 없이 풀 방구리 쥐 드나들 듯하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중 데이도쿠의 작품 차용
※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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