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 / 안도현
이사를 할 때마다 책 때문에 골치다. 아까워 버릴 수도 없고, 갖고 있자니 짐이 된다. 방도 책꽂이도 모두 비좁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도 있고 두어 페이지 설렁설렁 넘겨보다가 던져둔 책도 있다. 그럼에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내가 아직 책을 다 소화하지 못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책 읽기의 완성은 그 책을 미련 없이 버릴 때 이뤄지는 것일까?
고등학교 다닐 때 대구의 남산동 헌책방에 쭈그려 앉아 몇 시간씩 낡은 책을 뒤적일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현대사를 헌책방에서 배웠고, 하늘처럼 떠받들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왜 문제 많은 독재자인지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일반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시집들도 수북하였다. 나는 용돈을 쪼개 그중 몇 권을 샀는데, 놀랍게도 저자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었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시인이 역시 당대에 이름 높은 한 시인에게 증정한 시집이었다.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시집을 보낸 시인이 알면 얼마나 낙담하겠어. 증정 받은 시집을 소중히 간직하지 못하고 버린 시인이 그때는 얄미웠다.
1936년에 나온 백석의 시집 《사슴》은 100부 한정판이었다. 지금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은 다섯 손가락 안팎이다. 일설에 따르면 5억 원을 줘도 팔지 않겠다는 이가 있었다고 한다. 작은 꿈이 있다면 그 시집을 손으로 한 번 만져보는 것이다. 오래 바라보고 한 번 만져보는 데도 돈이 든다면 빚을 내서라도 그렇게 해보고 싶다. 너무 큰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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