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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기와를 내리다 / 예자비

기와를 내리다 / 예자비

 

 

 

잠자는 기와를 깨운다. 지붕 보수공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삼십여 년의 세월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기와다. 세찬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긴 세월 거뜬히 이겨냈지만 더 이상 풍상을 버텨내기 힘들었나 보다. 소나무 그늘에 가린 지붕은 겨울비로 인해 얼고 녹기를 반복하다 결국은 금이 가고 누수가 생겼다.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이지만 지나간 자리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세상에 생존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바람결의 구름처럼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제 이 기와들도 제 할 일을 다 했으니 지붕 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늘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던 그 자리에서 퇴출되는 것이다.

높고 낮은 위치는 바뀌지만 통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들이 내려오면 몇몇은 들꽃을 심는 화분으로 거듭날 것이다. 수키와와 암키와는 물러난 서러움을 꽃으로 채워, 지나가는 길손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더러는 화단의 울타리가 되고, 마당에 홀로선 나무들의 뿌리를 보호하는 둘레석이 되기도 할 것이다.

널찍한 양철판이 지붕 위에 올려 진다. 공사 중에 내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지붕 위의 지붕인 가설 덧집을 만들기 위해서다. 인부들의 리듬 섞인 어조는 노랫가락 되어 양철판의 무게를 줄여주는 것 같다. 커다란 철판을 주고받는 손이 가벼워 보인다. 이제 공사를 위해 오르내릴 계단도 마무리 단계다. 흙이 떨어지며 일어나는 먼지를 걸러주는 분진망이 설치되면 준비 작업은 끝이 난다.

인부들이 기와를 한 장씩 일으킨다. 아직 잠에서 덜 깬 기와들이다. 먼저 망와가 일어난다. 얼굴을 장식하고 있는 연꽃 문양은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신앙의 표현으로 양각된 것이라 한다. 다치지 않게 사뿐히 내려놓는다. 다음으로 지붕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수평마루인 용마루가 내려지고 그 아래로 연결되는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일어난다. 수키와와 암키와가 마지막으로 잠에서 깬다. 암키와를 걷어내니 따라 나설 듯 일어나는 흙덩이를 인부의 거친 손으로 쓸어낸다. 긴 세월 서로를 의지하며 품고 있던 흙과 이별을 하는 순간이다. 헤어지지 않으려고 떼를 쓰는 것만 같다. 인부들의 손끝에서 저들의 인연은 끝이 난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기와는 서툰 걸음을 내 딛을 준비를 해야 한다.

철제 파이프를 조립해 만든 강관 비계가 추녀 끝과 키를 맞추고 섰다. 그 위에 펴놓은 안전판 사이로 흙 부스러기가 포르르 떨어진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흙은 제 몸 둘 곳을 찾아가기에 바쁜 몸짓이다.

나는 우산을 쓸 때마다 지붕을 연상하곤 한다. 내리는 비가 우산살을 타고 떨어지면 빗물을 피하려 몸을 움츠리게 된다. 빗방울을 피하는 나의 몸짓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자꾸만 자꾸만 우산 속으로 파고들고 싶다. 지붕이 있는 건물이라면 더없이 좋다. 작은 체구를 더 작게 만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방으로 버티고 서 있는 기둥과 가로 누운 대들보가 아버지라면, 서까래, 지붕 그리고 벽은 어머니의 품과 같다. 비바람을 막아주고 추위와 더위도 피할 수 있는 그곳. 집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한다. 외부로부터 침해를 막아주니, 그 자유로움 속에서 행복을 피워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때로는 삶의 고뇌로 힘든 날도 있겠지만 지혜롭게 이겨내는 것 또한 자신의 몫이다.

한옥은 자연을 향한 열린 공간이기에 방문만 열면 자연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햇살이 좋으니 산책을 가자고 꼬드기기도 하고 바람이 많이 부니 흙먼지를 피하려면 방문을 닫으라고도 한다. 문을 닫으면 흙벽의 편안함 속에서 보호받고 싶은 심연에는 태중에서의 안온함이 잠재적 그리움으로 남아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지붕의 기와 보수 작업이 차질 없이 마무리될 것이라 믿는다. 숙련공의 솜씨로 든든한 기와지붕을 선물 받을 것이다. 어머니의 품 같은 안락한 보금자리가 되기를 꿈꾸며, 고단해 보이는 내려놓은 기와를 말없이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