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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오래된 약속 / 이지원

오래된 약속 / 이지원

 

 

 

추석날 저녁이었다.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저녁 늦게 친정으로 왔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자 엄마가 뒤꼍으로 나를 불러내었다. 한가위 밝은 달빛이 탱자나무 울타리에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달빛 속에 서 있는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아 얼른 묻지도 못하고 있는데 봉투 하나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며칠 전에 연경이 엄마가 다녀갔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연경이 엄마?’ 하도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제서야 기억 속에서 연경이 엄마란 호칭이 불쑥 떠올랐다.

십오 년 만에 돈 백만 원을 가져 왔더라는 것이다. 순간, 나무나 놀라 나는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연경이 엄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연경이 엄마와 막역한 사이였으며 엄마의 부자 친구이기도 했다. 그 집 아저씨 아줌마는 검정색 세단을 타고 다녔다. 자동차가 귀해 아무나 가질 수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 연경이 집은 이자를 은행보다 많이 주는 일명 돈놀이를 하던 집이었다.

갓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는 적금을 부어 당시로서는 거금인 백만 원을 만들었다. 엄마는 그 돈을 연경이 집에 맡기자고 했다. 명색이 딸이 은행원인데 무슨 말씀이냐고 했지만 은행보도 이자를 더 많이 주니 돈을 빨리 불릴 수 있다며 나를 구슬렸다. 친구를 한없이 신뢰하는 엄마는 무조건 그 집에 돈을 맡기고 싶어 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타서 쓰면서도 뒷주머니를 찼던 모양이다. 꼬깃꼬깃 모은 오십만 원을 연경이 집에 빌려 주고 매달 꼬박꼬박 이자를 받고 있었다.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엄마와 친한 친구이고 나는 그 집을 잘 아는 터라 알아서 하시라고 돈을 맡겨 버렸다. 연경이 엄마는 인정스럽고 어진 성품을 가졌기에 미덥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연경이 엄마 아빠는 자가용으로 동네를 돌며 날짜 한번 어기는 법 없이 맡긴 돈의 이자를 주고 다녔다. 그런 그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신뢰를 쌓아갔지만 피라미드식사채놀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막판에 들어간 내 돈 백만 원은 이자 한 푼 받지 못한 채 공중분해가 돼 버렸다. 아니, 내 돈뿐만이 아니라 연경이 집을 믿고 큰돈을 맡긴 사람들은 다 떼이고 말았다. 작은 도시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은 그 일을 대형 금융사고였다.

남에게 싫은 말 한마디 할 줄 모르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어수룩한 엄마는 이자 받는 쏠쏠한 재미에 빠져 딸의 돈까지 맡겼다가 돌이킬 수 없는 낭패를 당했다. 큰돈을 떼인 사람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지만 내게는 거금이었던 그 돈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목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되자 엄마는 나보다 더 상심을 하며 드러눕고 말았다. 며칠을 끙끙 앓던 엄마는 몸을 추스르고 나와 함께 연경이 엄마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날도 달이 몹시 밝았었다. 천변을 끼고 밤길을 걷는 우리 모녀의 마음과 달리 달빛은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거렸다. 연경이네 넓은 양옥집은 괴괴한 적막에 싸여 있었다. 안방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열두 자 자개 장롱과 화초장은 온데간데없었다. 돈을 떼여 흥분한 사람들이 온 집안을 헤집고 간 흔적만 나뒹굴고 있었다. 머리를 싸매고 초주검이 된 연경이 엄마와 대면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의 모습은 마주보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연경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도 함께 울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돈은 꼭 갚아주마.” 여윈 손으로 차용증을 써 주었다. 모녀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종이 한 장 달랑 손에 쥐고 그 집을 나왔다. 차용증은 서로에게 최선의 위안일 뿐, 그것은 부질없는 약속이었다.

엄마는 당신 돈 오십만 원은 크게 아까울 것도 없지만 딸 돈 백만 원이 너무나 아까워 생각할수록 어리석은 짓을 했다며 가슴을 쳤다. 그러면서도 연경이 엄마를 크게 원망하지는 않았다. 네 돈은 갚아 준다고 했으니 언젠가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나를 위로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우리 엄마 참 순진하시지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헛된 기대는 빨리 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떼인 돈은 값비싼 인생수업료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구러 세월은 흘러갔고 그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남기고 잊혀져 갔다. 바람결에 간혹 연경이 집 소식이 들렸다. 아줌마는 그 병원 신세를 지다 결국 돌아가셨다고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연경이 오빠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그런데 돈이 돌아왔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추석이 되기 며칠 전, 연경이 오빠가 엄마를 찾아와 너무 늦어 죄송하다며 돈을 내밀었단다. 연경이 엄마는 병상에 있으면서도 사진관 집’ - 연경이 엄마는 우리 엄마를 그렇게 불렀다.- 돈은 꼭 갚아야 한다며 아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는 것이다. 아들은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유언 같은 어머니 말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고 했다. 부모가 진 빚을 꼽닥스레 갚아 주는 자식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망자가 꿈에까지 나타나 사진관 집 돈은 꼭 갚아 주어라.’고 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생애 첫 목돈은 그렇게 기구한 사연을 담고 내게 다시 돌아왔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먹먹한 기분이 되었다. 눈곱만 한 기대도 품지 않았던 돈이 돌아왔다. 풍비박산이 난 연경이 집을 찾아갔던 그날 밤처럼 엄마와 나는 마음이 착잡했다.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도 지켜지지 않는 것들이 많은 세상이다. 연경이 엄마는 이 세상을 떠나서도 아들로 현신해 친구 딸인 나에게 약속을 지켰다. 지금에 아서 그 돈의 가치를 따질 수는 없을 것이다. 망자가 되어서도 돈을 갚고 싶었던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며 옷깃을 여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