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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신다 울루(神茶 鬱壘) / 구활

신다 울루(神茶 鬱壘) / 구활

 

 

 

신다와 울루는 상고시대 형제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힘이 세고 눈이 형형하여 요사스러운 악귀를 잘 물리쳐 문신(門神)으로 대접받았다. 조선조 때 관상감이란 관청에서 붉은 글씨로 신다 울루라고 쓴 글씨를 문설주에 붙이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중의 냄새도 맡지 못하고 자랐다. 윗대 어느 할아버지께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시골의 문중을 떠나 대처로 나온 것이 후손인 내가 문중을 잃어버린 직접적인 동기가 되는 셈이다. 더욱이 이른 나이에 아버지가 세상을 버린 데다 크리스천인 어머니 손에 자랐기 때문에 가문에 대한 유교적 전통과 상식을 전혀 듣지 못한 채 유년을 보냈다.

제사와 예절 그리고 친척 간의 교류는 문중의 법도를 따르면 저절로 배워진다. 그러나 나는 외톨이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관혼상제의 예법을 배우지 못했다. 명절과 기일이 되어도 찬송가 한 번 부르고 기도가 끝나면 아멘하고 소리치면 그게 제사의 끝이었다.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제상 차리는 방법도 모를 뿐 아니라 절하는 방법조차 서툴다.

철이 들면서 아버지의 기제사는 나 혼자 전통 방식대로 지내고 싶었다. 어머니에게 들키는 날엔 빗자루가 거꾸로 서는 난리를 겪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생각뿐이었다. 고향 뒷산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는 제삿밥 한 그릇 못 잡순 지가 오래 되었다. 굶주림에 지쳐 두 번째로 운명하셔서 저승보다 더 먼 황천 어딘가로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불쌍한 아버지.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하고 넘어가도 어머니가 이놈아하고 이승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겠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경주의 어느 조각가에게 부탁하여 어머니의 흉상을 제작한 적이 있었다. 몇 달 동안은 잠잠했었는데 어느 날 교회에 다녀오시더니 자신의 흉상을 망치로 깨기 시작하셨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그날 낮 예배의 설교 제목이었다.

나는 문중의 법도는 물론 동네의 풍속도 아는 게 없다. ‘입춘대길이라 쓴 글씨를 집안 어디에도 붙인 적이 없다. 초가삼간 사립문에 그걸 붙일 수도 없고, 부엌 앞에 바람 가리개로 세워둔 짚동에 붙일 수도 없었다. 봄이 일 년에 두 번쯤 와도 공납금을 제때 내는 그런 길한 일은 전혀 없었다.

, 본론으로 들어가자. 최근 문중 법도와 세시풍속을 익히지 않아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그게 바로 신다 울루(神茶 鬱壘) 때문이었다. 대경문화발전연구회(회장 강인호 계명대 교수)가 대구에 유학 온 18개국의 학생들을 데리고 영덕 영해의 괴시고택으로 팸투어에 나선다기에 따라나섰다.

괴시마을엔 망월산 아래 삼십여 골기와 고택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여느 고택처럼 민박 손님을 받는 집도 드물었고 한결같이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대문이 없는 집으로 들어서니 안채로 들어가는 두 쪽문에 신다 울루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그 집만 그런 게 아니고 거의 집집마다 그 글귀를 명찰처럼 달고 있었다.

남에게 물을 수도 없고 입안에서 뱅뱅 도는 신다 울루가 머릿속까지 점령하여 정신을 하얗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고택의 주인에게 신다 울루가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었다. “잘 몰라요. 잡귀가 달려들지 말라고 붙인 부적이겠지요.”

걸음은 마을을 도는데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괴시마을은 원래 호지라는 못이 있어서 호지촌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고려 말 이 마을 출신 목은 이색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그곳 구양박사의 출생지인 괴시마을과 풍경이 닮았다 하여 괴시마을로 개명했다고 한다. 지금은 조선조 인조 때 들어온 영양 남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는 남씨 괴시파 종택을 비롯하여 물소와(勿小窩)서당 등 무려 14채의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가옥들의 구조는 입구()자 형태의 조선 후기 영남지역 전통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입구자 가옥은 사방을 건물이 막고 있어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엔 문만 열어두면 시원한 게 특징이다. 집안으로 들어오면 하늘이 네모로 뻥 뚫려 있어 낮에는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밤에는 달빛과 별빛이 놀다 간다. 이렇게 네모난 하늘 지붕을 예부터 햇빛우물이라고 불러왔다.

집으로 돌아와 궁금증 해소를 위한 문헌조사를 했다. 신다와 울루는 상고시대 형제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힘이 세고 눈이 형형하여 요사스러운 악귀를 잘 물리쳐 문신(門神)으로 대접받았다. 조선조 때 관상감이란 관청에서 붉은 글씨로 신다 울루라고 쓴 글씨를 문설주에 붙이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회가 되면 신다 울루란 부적을 마음 한 자락에 붙이고 괴시고택을 다시 찾아야겠다. 그 마을은 부적 때문인지 몰라도 발을 들여 놓는 순간부터 강 같은 평화와 산 같은 화평을 느낄 수 있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