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적 / 류영택
수십 년을 함께 산 아내보다 더 많이 옥신각신 해오다 보니 숫제 말로 서로 눈빛만 봐도 속내를 알고도 남을 것 같다.
살풀이, 씻김굿 남의 궂은일을 풀어주느라 맨발에 작두 타는 무당 등쳐먹는 무당오라비도 아니고, 날만 새면 가자미눈을 하고 가게를 살피는 땅주인의 눈빛이 등에 실려 올 때마다 일을 할 맛이 딱 떨어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함께 마당을 쓰고 있는 세입자들은 땅주인이 나타날 때마다 카멜레온이 된다. 행여나 불이익을 당할까봐 벌레 씹은 표정을 짓다말고 금세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한다. 세입자들의 그런 모습에 재미를 내서 찾아온다면 그런 일쯤이야 마음을 숨기고 얼마든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땅주인은 가게에 손님이 없어 빈둥빈둥 놀 때는 오지 않는다. 마당에 커다란 덤프트럭이 서너 대 들어오고, 펑크를 때우느라 정신 없이 곡괭이질을 할 때 찾아온다. 그러고는 남들은 손님이 없어 빈둥빈둥 노는데 혼자 돈을 버느라 바쁘다며 오장육부를 확 뒤집어 놓는다. 마음 같아서는 그래, 영감탱이야. 어서 돈 벌어 이 땅을 다 사련다.
땅주인이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 나대지에 땅을 얻을 때만 해도 순진 무궁, 뿌린 대로 거두는 농사꾼이었다. 일 년 땅세를 건 내고 계약서를 쓰면서 나는 웃음을 참느라 사지를 뒤틀어야만 했다. 땅주인은 금액란에 받은 돈 액수를 적지 않고 백미 석 섬이라 적었다. 도지 얻은 토지세를 주는 것도 아니고 백미 석 섬이 웬 말인가. 뜨악해 있는 내 모습을 보며, 평생 농사만 짓던 사람이 무슨 욕심이 있겠는가. 그저 그 땅에 나오는 쌀만큼만 세를 받으면 되지. 그 논은 재수가 좋은 논이니 돈을 많이 벌 거라며 덕담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발목까지 푹푹 잠기는 논에 휴무 관을 묻고 땅을 돋아 가게를 차리자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게를 차리느라 투자한 돈이 얼마인데 땅주인은 그것은 생각지 않고 현재 자신의 눈에 비친 땅의 값어치를 생각한 것이다.
땅주인이라고 해도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이미 계약서에 이 년이라 명시를 해놨는데. 마음을 놓고 가게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일 년을 못 채우고 정확히 일 년에 석 달을 남겨두고 가게로 내용 증명이 날라 왔다. 내용인즉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러니 석 달 후 가게를 비워달라는 말이었다. 만약 그때까지 비워주지 않으면 법으로 해결할 것이며 아울러 법 집형에 따르는 비용을 세입자가 덤터기 쓸 수밖에 없다는 내용도 쓰여 있었다.
세입자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주인이 비켜달라면 비켜줘야지. 그 날부터 가게를 차릴 만한 자리를 물색하느라 이곳저곳을 수소문 하고 다녔다. 나보다 늦게 들어 온 세입자들도 자리를 알아보느라 동분서주했다.
그동안 코빼기도 안보이던 땅주인이 떠나기로 한 날짜를 일주일을 남겨두고 찾아왔다. "자리는 알아봤나?" 세입자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서로 눈치를 보고 있던 세입자들은 땅주인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이사 갈 땅은 얻어 놓았고, 땅주인의 음흉한 속셈을 몰랐던 나는 가만히 자리에 서 있었다.
"자네는 이사 갈 자리를 알아낫는 모양이제?"
나는 순간 머리를 굴렸다. 이사 가서 자리를 다지고 장사를 하려면 적어도 몇 달이 걸릴 것이고, 어찌 사정을 해서 자리에 눌러 있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행여 괘씸죄에 걸리면 그때는 빼도 박도 못할 것 같았다.
땅주인은 더 이상 농사나 짓던 농사꾼이 아니었다. 자신이 하기에 따라 수많은 사람의 밥줄을 옭아맬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지금까지 불러오던 영감님이 아닌 사장님으로 변신해 있었다. 세입자들은 합창을 하듯 '사장님, 없는 사람 먹게 살게 해주십시오.' 조폭 두목에게 인사를 하듯 상반신을 굽혔다.
백미 석 섬, 일 년 세가 끝나던 날 세입자들은 다시 계약서를 썼다. 지난번처럼 이 년이 아닌 일 년 계약서를 쓰고 금액란에도 백미 석 섬이 아닌 지난 번 세보다 세 배를 더 한 금액을 써야만 했다.
그렇게라도 눌러 앉아 있을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해마다 세를 두 배씩 올려 받으면서 그때마다 한바탕 소동을 치려야 했다. 연례행사도 아니고, 억눌러 왔던 세입자들의 불만이 터지고 말았다. 그해도 어김없이 내용증명이 날아왔다. 그런데 이번은 쇼가 아닌 것 같았다. 땅주인은 세입자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나무를 심기로 했다는 것이다. 몇 년 후면 길이 난다고 하니, 세를 놓는 것보다 나무를 심어 보상을 받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세입자들도 바보는 아니다. 그동안 번 돈을 땅세로 다 나가도 참고 견딘 것은 그것 때문인데 쉽게 나가려고 할 것인가. 버틸 때가지 버티자는 것이다.
난생처음 판사 앞에 불러나갔다. 판사는 나와 세입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주인이 비켜달라면 비켜주지 왜 안 비켜줍니까. 앞으로 얼마의 시간을 주면 비켜줄 겁니까?' 판사는 땅주인과 세입자의 말을 듣고는 석 달의 시간을 줄 테니 그때까지 비켜주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변호사 비용은 각자가 물으세요. 몇 달 간의 싸움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애초에 승산 없는 게임이라며 변호를 맡을 변호사를 구하지 못한 우리 쪽에서는 그걸로 끝이었지만 땅주인은 변호사 비용으로 수월찮이 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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