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에서 / 허창옥
해변이다. 접이식의자에 비스듬히 개대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본다. 파타야 해변, 이른바 휴양지다. ‘편안히 쉬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에 좋은 장소’ 뜻 그대로라면 무엇보다 조용해야할 것이나 그렇지가 않다. 일상의 틈새에서 어렵게 빼낸 시간이어서 모두들 기분이 고조되어 있다. 말소리가 높다. 색깔도 곱다. 해변은 왁자지껄하고 화려하다.
몸과 마음이 몹시 어려울 때 여행에 합류했다. 어느 날 누군가 “여행!”을 소리쳤고 나머지는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나는 이 모임의 올해 당번이다. 신의의 문제여서 빠질 수가 없었다. 정신의 힘과 몸의 힘을 모두 합쳐서 기쁜 듯이, 무척 즐거운 듯이 함께하고 있는 시간이다. 많이 아프다.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온몸이 아프다. 감각기관들이 한데 뭉쳐서 총 공격을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웃는다. 폐를 끼치고 싶지가 않아서다. 종아리부터 발가락까지 퉁퉁 부었다.
스피드보트를 타고 해변에 닿았다. ‘스피드’, 이름값을 하느라 빨랐다. 뱃머리에서 바닷물은 솟구치고 부서져 내리기를 반복한다. 짧은 항해를 끝내고 해변에서 쉬고 있다. 모두들 해변에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고 바다로 뛰어든다. 나는 옷과 짐을 지키겠다고 나섰다. 휴양지의 해변이라는 그 화려함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비치의자에 몸을 맡긴 채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편안하다.
이따금 바다에 가면 다 내려놓고 마음을 풀어내는 시간을 가진다. 집을 떠나긴 했으나 나는 이곳저곳을 들여다보고 다니기보다 한곳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오래 앉았다가 바닷물로 가만가만 걸어가서 손으로 물을 만지고 발을 들여놓는다. 발목에 와 감기는 바닷물의 촉감에 감격한다. 오, 나는 살아있구나. 생생하게 살아있구나.
그럴 때면 춤을 추고 싶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격정적인 춤을 추면서 무거움을 털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다. 동해의 남호해변에서 밤중에 딱 한 번 춤을 시도해보았지만 두 팔을 흔들면서 몇 번 뛰었을 뿐이다. 내 혼과 몸이 경계 없이 하나가 되어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조르바의 경지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려니. 나는 참 못났다. 탁 트인 수평선을 바라보면서도 스스로를 볶고 뒤집곤 했다.
그나마 다행하게도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오래 바라보면서 날숨들숨을 거듭하고 있으면 마침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지금이 그렇다. 쉬고 있으니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해변을 걷는 사람들, 장난치며 떠드는 사람들, 바나나보트 타는 사람들, 챙이 큰 모자나 해변용 슬리퍼 들고 “예쁘다.” “싸다.” “5천원!”을 우리말로 외치는 현지 상인들, 정신이 나갈 정도로 소란스럽지만 그런 정황들이 나를 방해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냥 내 맘대로 써도 좋은 시간을 확보해서 좋다.
의자에 누워서 눈을 감고 파도소리를 듣다가 불현듯 벌떡 일어났다. 몸이 그렇게 한 것이다. 현지 안내자에게 자리를 부탁하고 바닷물로 걸어 들어간다. 통이 넓은 청바지가 허벅지까지 젖어서 무겁다. 입이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저 혼자 말을 토해낸다. “파도야, 네가 아무리 몰아쳐봐라. 내가 못 이기나. 못 버티나.” 한 번 터져 나온 말은 잘도 나와서 거듭 소리를 지른다. 허리를 굽혀 두 팔로 파도를 끌어안는다. 그래 오너라. 내가 다 받아줄게, 받아주고 말고.
바지를 툴툴 털면서 의자로 돌아온다. 일행은 바나나보트에서, 해변에 늘어선 상점들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여기까지 와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그래야 나머지 일정을 따라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 보니 영문을 일 수 없는 쓸쓸함이, 고단함이 따라왔다. 고단하긴 해도 쓸쓸하지는 않다. 누구나 나이만큼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는데 나도 그렇다. 두어 가지의 지병과 30년 정도를 동고동락하여왔다. 최근에 한 가지의 질병에 만만찮은 합병증이 쫓아왔다. 여행일이 다가왔을 때 최고조로 아팠다. 그래도 합류했다. 말했듯이 당번이어서 그렇고, 이번을 놓치면 다음엔 정말 안 되지 않을까란 부풀려진 염려도 한몫을 했다.
여행의 후유증으로 한 달 남짓 아팠다. 찢어진 잎 몇 장 붙들고 있는 플라타너스를 내다보며 몸을 좀 정리했다. 현재로선 다시 어딘가로 떠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날 해변에서의 시간이 그래서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몸으로 파도를 받아 안으면서 당당하게 맞섰다. “내가 못 이기나. 내가 못 버티나.” 그걸로 됐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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