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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차상(茶床) / 정목일

차상(茶床) / 정목일

 

 

 

차 한 잔을 마시는 일은 손쉬운 일이기도 하지만, 일생에 잊히지 않는 순간일 수도 있다.

차려진 차상茶床을 바라본다. 차상은 느티나무, 소나무 등 통나무를 켜서 쓰기도 한다. 1백 년 이상의 고목이면 더욱 좋다. 차상의 아름다움은 나이테의 무늬인 목리문木理紋에 있다. 훌륭한 소목장(小木匠: 목가구품 만드는 장인)은 고목의 겉모습을 보고, 나무가 품은 목리문을 짐작할 수 있다. 경험이 많은 석공石工이 정으로 바위를 쳐 소리를 들어보면, 바위가 품은 성격과 질을 간파할 수 있는 이치일 듯싶다.

나무는 일 년에 한 줄의 나이테를 가슴에 새긴다. 1백 년 된 수령의 나무라면 1백 줄의 나이테로 일생의 체험과 감정을 목리문으로 그려 놓는다. 목리문 속엔 햇살과 빗방울과 달빛의 말이 깃들어 있다. 나무는 자신이 겪은 삶의 체험과 기억들을 목리문 속에 한 폭의 추상화로 그려 놓는다.

찻잔을 손으로 어루만지면 차상의 목리문과 마주한다. 목리문의 아름다움은 넘볼 수 없는 삶의 미학이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아 나무가 오랜 세월의 내공과 깨달음으로 그려 놓은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4계절의 숨결과 추억이 쌓여 한 줄씩 새긴 삶의 체험들이 생생하고 섬세한 그림으로 남겨졌다.

차상을 마주하고 차를 들 때, 한 나무와 대면하여 대화를 갖는 순간이다. 나무는 자신의 체험과 사유들을 일 년마다 한 줄씩 목리문으로 그려 놓는다.

차상의 목리문 위에 차 한 잔을 올려놓는다. 목리문의 모습 속에 깃든 말들을 생각하면서 나무의 삶과 만나는 순간이다. 나무가 맞았던 햇살과 달빛, 빗방울과 바람의 촉감을 떠올려 본다.

나무가 새겨놓은 삶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보면서 내 삶의 목리문을 만들지 못한 안타까움을 절감한다. 도공이 한 가마에서 구워낸 찻그릇일지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명기名器도 되고 평범한 그릇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릇의 품격이 달라진다. 마음이 맑고 사유가 깊은 사람의 찻그릇은 고매한 생각과 인격의 향기가 스며들어 맑고 오묘한 표정을 띠게 된다. 찻그릇은 쓰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기에 양기養器라는 말을 쓴다. 그릇을 기른다는 뜻이다.

유독 찻그릇에만 인격을 부여하고 있음도 놀라운 일이다. 혼자서 차를 마실 때, 찻그릇은 한 대화자가 되기도 한다.

찻그릇은 마음의 한가운데에 놓인다. 혼자 차를 마시는 일은 마음과의 대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