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 최종희
울창한 솔숲이 왕을 둘러싸고 있다. 긴 세월을 동고동락하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안위를 보살폈으리라. 허리가 구부정한 노송이 충심 어린 신하인 듯하다. 바깥소식이 궁금한 왕에게 방문객의 출현을 지체 없이 아뢰는 모양이다. 솔향기가 잰걸음으로 달려 나와 왕의 위엄을 전한다. 왕이 계신 곳이니 정중하게 예를 갖추라는 신호를 보낸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신도를 따라 마주앉은 능을 바라보며 엄숙한 기운에 젖어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여민다.
입구에서 능을 지키던 무인석이 나그네를 살피며 경계하는 눈치다. 양옆으로 늘어서서 왕을 보필하느라 한낮의 뙤약볕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출입하는 이들을 꼼꼼히 검열이라도 하는 것인가. 불끈 쥔 주먹에 칼을 찬 품새가 만만찮다. 언감생심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했다가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다. 그런데 인상이 참 괴이하다. 움푹 들어간 부리부리한 눈에, 코는 높고 콧구멍은 크다. 곱슬곱슬한 구레나룻으로 덮고 있는 턱이 윤곽이 어딘가 낯설다. 머리는 터번을 쓰고, 몸은 부드러운 비단옷을 걸쳐 살짝 주름 잡힌 차림새다.
아득히 먼 옛날, '처용가'에 나타나 서라벌을 활보했던 아랍인들을 신라 원성왕이 잠들어 있는 괘릉에서 다시 만난다. 비단길을 통해 세계로 달려 나간 신라인들의 활달한 기상이 맴도는 공간 속에 머문다.
얼마 전, 괘릉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경주를 고향으로 둔 이가 고위관직에 근무했을 때의 일화이다. 아랍지역에서 획기적인 사업을 추진하자 입찰을 따내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우리나라는 기술, 자본, 인력, 어느 것 하나 경쟁국에 따라가지 못하는 암담한 수준이었던지라 고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치밀한 사업계획을 브리핑하는 상대방과 달리 느닷없이 "당신 할아버지들과 우리 할아버지들은 오래 전부터 친구였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에 당신네 조상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괘릉에 있는 아랍인들을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여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아마 멀고도 먼 그 시대에 낯선 이방인들과 허심탄회하게 소통할 정도의 혜안을 가진 조상이라면, 그 후손들에 대한 기대를 하여도 괜찮으리라는 신뢰가 깔렸기 때문일 터이다.
문화해설사가 어미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따라 나선 딸을 향해 자꾸 질문을 던진다. 처음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아이였지만, 왕의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풍성한 말꽃이 핀다.
왕은 왜 이방인에게 자신을 보필하라는 어명을 내렸을까. 어쩌면 마음껏 속내를 터놓을 수 있고, 안위를 맡겨도 되는 가장 절친한 벗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생판 낯선 만남이 참 어색하였을 것 같다. 문화와 언어, 생김새부터 확연히 다른 선입견을 훌쩍 뛰어넘어 오랜 친구로 남게 된 인연은 분명 삶의 섭리를 일깨워 준다.
지금 나란히 걷고 있는 남편과도 동일한 사고와 문화를 가진 단일민족이라 여겼다. 허나 살아갈수록 알아듣지 못하는 외계어들이 남발했다. 노랑머리 백인인가 싶어 절망감이 들 때도 여러 번이고, 검은 곱슬머리의 흑인 같아 보여 어이가 없던 적도 한두 번 아니다. 사사건건 부딪치며 서로가 서로를 틀렸다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어느 순간부터,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들도 하나의 개성으로 바라보는 경지까지 다다랐을 정도다.
문화해설사의 거듭되는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하는 딸아이의 목소리에 신명이 실린다. 아이는 학교에서 이과 계열을 공부한 때문인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상식이나 개념 따윈 자기와 상관없는 이방인의 학문쯤으로 인식했었다. 전공분야만 추구해도 진이 빠져서인지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저러다 외골수가 되어 버리면 어떡하나 싶어 염려스럽기도 했었다.
죽음에 순응한 왕의 집 앞에서 오히려 그 넋이 살아 숨 쉼을 느낀다. 이방인을 친구로 맞아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역사가, 후손들에게 거대한 프로젝트의 성공을 선물했듯, 긴 역사의 숨결 속에서 내 아이에게 편협하지 않은 사고의 소통을 넌지시 일러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천년의 세월이 담긴 향기를 물려받아. 또다시 천년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주인공들 가운데 한 사람일 테니 말이다.
저명한 어느 학자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냉엄한 현실을 지적하며 인간관계에서 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고정관념으로 묶어진 단단한 틀은, 무장 태세를 갖춘 군인들이 지키고 선 국경의 장벽보다 높아 부딪혀 깨질 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가 앞으로 사회에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신과 다른 사고들이 엄청난 속도로 침범해 올지도 모른다. 마음의 경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우리'라는 울타리 밖에서 이방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지 않으랴. 괘릉에는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탈피한 통通의 기운이 흐른다. 마치 세계화를 예언이라도 하듯, 진취적인 모습들이 다분히 미래지향적이다. 자신과 다른 이들을 포용하고 껴안아 오랜 친구로 남게 된 본보기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 낼 수도 있으리라.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아집의 틈새에서, 하나의 합일점을 찾아 흐르는 통의 깨달음을 알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왕은 치세 동안의 업적을 후손들에게 내세우듯,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자리에 이방인을 호위무사로 임명했다. 그렇다면 나도, 서로를 이방인이라 우겼던 우리 부부가 화합하여 가정을 슬기롭게 일구어 나갔다는 자랑거리 하나 남기고 싶다. 내 아이들이 세상과 통하여 환한 웃음을 짓고 살아갈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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