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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신의 한 수 / 박미정

신의 한 수 / 박미정

 

 

 

정월 대보름이다. 하늘에는 휘영청 보름달이 떴다. 동기들과 갖가지 나물이 어우러진 밥상앞에 둘러앉았다. 부럼까지 깬 후에야 윷놀이가 시작된다.

윷놀이에 이기려면 윷말도 잘 놓아야 하지만 운도 따라야 한다. 말을 놓는 사람은 윷판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잡아 먹고 먹히는 윷판의 변수는 우리네 인간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선조들은 정월 초부터 보름까지 윷놀이를 즐겼다. 보름이 지난 후에 윷놀이를 하면 벼가 죽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그것은 윷놀이의 흥취에 푹 빠져 농사를 소홀히 할까봐 나온 얘기가 아닌가 한다. 윷놀이의 변천사 중 윷패의 흐름을 보면, 도.개.걸.윷으로 일컬어지는 사진법 놀이에서 '모'가 합친 오진법으로, 지금은 '뒤도'가 하나 더 생겨나 육진법의 놀이로 변화되었다.

해 지난 달력위에 윷판을 그린다. 윷을 던졌을 때 멀리 튀지 않게 담요를 깔고 편을 가른다. 남녀의 대결이다. 윷말이 재미있다. 동전과 고추가 윷판위에 나란히 올랐다. 윷판에 말을 놓는 사람은 윷을 던질 수가 없다. 나는 얼른 고추를 거머쥔다. 윷 한 번 던져보지도 못하고 말을 놓는다. 윷가락이 공중에서 곡예를 한다. 바닥으로 떨어져 등을 보이며 허연 배를 드러낼 때 마다 친구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자지러진다. 윷말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숨막히는 대결이다.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게 우리네 인생이런가.

승부를 가름할 수가 없다. 잡고 먹히는 긴박감속에 한 판의 승부가 눈 앞에 있다. 상대는 골인점 가까이에서 우리의 말을 잡으려고 대기중이다. 친구가 윷을 가지런히 모아 쥐고 기도를 한다. 그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잠시 침묵이 흐른다. 윷을 일정 높이까지 던져야 하므로 꼼수를 부릴 수도 없다. 나는 '모'와 '걸'이 나와 준다면 상대와 대결을 않고도 바로 날 수 있는데, 내심 욕심을 부려본다. 공중으로 날으던 윷이 바닥으로 엎어지면서 모두 등을 보인다. '모'다. 여자들이 방방뛰며 두 '모'를 외친다. 남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안절부절 못한다. 두 '모'까지 필요없다. 나는 벌떡 일어나 '걸'을 목청껏 부른다. 과연 '걸'이 나올 것인가. 제발 등을 바닥에 붙이고 허연 배를 내밀어라. 윷가락이 공중으로 치솟는다.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걸'이다. 나는 신의 한 수로 말을 거꾸로 쓴다. '걸'로 지름길을 열고 '모'로 마지막 동이 골인점을 통과한다. '모'부터 썼다면 멀리 돌아서 그들의 밥이 되었을 터이다. 재갈공명의 지략도 울고 갈 판이다.

기고만장했던 남자들이 벼락을 맞은듯 멍하니 서 있다. 신의 한 수에 우리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윷말로 동전보다 고추를 거머쥔 나의 선택이 탁월했던가. 여자들은 승리의 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는데, 남자들은 쓰디 쓴 소주만 벌컥벌컥 들이킨다.

어쩌랴. 인생은 본디 윷판처럼 달고도 쓴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