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가처럼 / 小珍 박기옥
장을 보다가 길 한 켠에 꽃 화분 몇 개를 놓고 팔고 있는 할머니한테 눈이 갔다. 3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바람이 찬데 꽃잎이 발그라니 물들어 있다. 절기란 이렇게 무서운 건가.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꽃은 피게 되어 있다. 복잡한 시장 한 구석에서 꽃은 기어이 꽃이 되고자 자기 몸을 뚫고 나와 세상을 향해 깃발을 흔들고 있다.
꽃을 보니 정훈희의 ⌜꽃밭에서⌟가 생각난다. 가요는 형식과 가사, 내용이 얇아서 새로운 가수가 새로운 느낌으로 접근하여 부르면 원곡보다 더 좋을 수도 있지만 ⌜꽃밭에서⌟는 정훈희를 능가할 가수가 없다. ‘고운 잎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이여’는 노래 자체가 그녀만의 꽃이요, 꽃잎이다.
요즘 들어 부쩍 유행가가 좋아지는 것은 계절 탓일까, 나이 탓일까. 꽃이 피면 꽃만 보이고 잎은 안 보이던 시절, 한때는 클래식을 고집했던 적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일’ 보다는 ‘해야 할 일’이 우선임을 강조하고, 감성보다는 이성을 앞세우며, 클래식 같은 고급문화를 선호했던 젊은 날이다. 어느 일요일 늦잠에서 깨어나 침대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때 스무 살짜리 아들 방에서 나직이, 그러나 묵직하게 바흐의 무반주 첼로 곡이 흐르는 것을 들으며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제 나는 꽃보다 잎에 눈이 가는 나이가 되어 유행가에 흠뻑 빠져들고 있다. 어느 봄비 오는 날 카페에서 「빗속의 여인」을 색소폰으로 기가 막히게 부는 연주자가 있어 넋을 잃고 바라본 적이 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나의 그 모습이 마뜩찮았는지 자기도 옛날에 색소폰을 조금 불었었다고 넌지시 자랑했다. 나는 순간 정색하여 무슨 말씀이냐고, 색소폰은 늙고 초라하고 못 생긴 남자가 불어야 깊은 슬픔이 느껴지고 호소력이 있다고 쏘아 붙였는데, 그럼 나는 젊고 넉넉하고 잘 생겼다는 뜻이냐고 헷갈려해서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시어머니 모시고 뉴질랜드 갔을 때 바에서 칠십이 넘었음직한 늙은 남자가 「My Way 」를 색소폰으로 부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입을 다물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던 것이다. 나는 그 때 선뜻 지갑을 열어 팁을 주었었다 .
어느 해 연말, 다리를 다쳐 허벅지 끝까지 깁스를 한 적이 있었다. 꼴도 민망하지만 출근하는 사람이 목발을 짚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거리는 크리스마스와 망년회로 들떠 있는데 나는 불시에 장애자가 되어 마음이 우울했다.
직원들이 조를 짜서 출, 퇴근을 시키는 바람에 그럭저럭 기본적인 직장생활만 꾸려가던 중 망년회를 하게 되었다. 회식이 끝난 후 집으로 먼저 가려고 하는데 직원들이 놓아주지 않았다. 목발을 뺏으며 구태여 노래방에 데리고 가니 모양이 참 가관이었다. 나이 든 여자가 목발까지 짚고 노래방이라니!
술이 나오고 이러저러한 노래가 한 바퀴 돌았다. 처음 듣는, 그러나 가슴을 치는 노래가 나왔다. ⌜무조건⌟이다 .
내가 필요할 땐 나를 불러줘. 언제든지 달려갈게
낮에도 좋아 밤에도 좋아 언제든지 달려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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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술을 조금 마신 탓일까. 가사 하나하나가 나의 심장을 파고 들었다. 사랑이 뭐 별건가. 필요할 때 무조건 달려가는 것이 아니던가.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둘도 없는 그 명쾌한 해답이 기어이 나를 울리고 말았다. 너무 멀리 있어 볼 수도 없고 너무 높이 있어 만질 수도 없는 사랑에 갇힌 나를 위하여 이름 없는 가수가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 달려오는 것이 사랑이라고.
일요일 오후. 청소를 하다가 걸레를 든 채 T.V 에 눈이 꽃인다. 장사익이 걸쭉하게 ⌜봄날은 간다⌟를 부르고 있다. 오래된 노래 ⌜봄날은 간다⌟에서는 백설희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드라’가 압권이지만, 장사익이 추레한 모습으로 T.V 에 나와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 가드라’고 내지르니 가슴이 시리다 .
누가 유행가를 나무라는가. 우리 인생이 바로 유행가가 아니던가. 그대도 나도 풀잎이 되어 흘러가고 있다. 유행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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