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기客氣 / 김길영
산악회에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1월 달 치악산 산행에 대한 안내문이었다. 서울에 살 때 오를 기회를 놓치고 언제 오를까 아쉬워했던 참이었다. 마침 이번 달 산행지로 치악산이 선택되어서 반갑고 가슴 가득 설레었다.
산행 날짜가 다가왔다. 강원도와 수도권 전체가 많은 눈이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고, 눈 위에 한파가 겹쳐 전국을 꽁꽁 열려 놓을 거라고 했다. 우리가 산에 오를 때를 생각해서 등산배낭에 아이젠이며 여벌 내의와 동행하는 사람들의 주전부리도 챙겼다. 점심 도시락은 양념 잘된 쌈장을 준비하고 노란 속 살배기 배추와 삶은 삼겹살 돼지고기도 빼놓지 않았다. 산행정보도 빼놓지 않고 다운받아 놓았으니 거의 완벽한 산행 준비였다.
천 리 길을 달려간 관광버스가 등산로 입구 널따란 주차장에 내려놓는다. 산 대장은 산을 완주할 사람과 버스를 타고 하산지로 바로 갈 사람을 구분 지었다. 산행할 사람은 나를 포함해 겨우 열한사람 뿐이었다. 버스는 우리만 남겨 놓고 서른서너 명을 태운 버스는 하산지로 휑하니 달아나 버렸다. 산행할 열한 명은 산행능력을 평가받고 또 선택받은 사람처럼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안내 지형도를 살펴보니 조금만 오르면 보문사를 지나고 향로봉과 남대봉을 넘어서 상원사를 거쳐 하산지에 도착하게 되어 있다. 30 여분 오를 때 까지는 내가 의기양양하게 앞장서서 올라갔다. 그런데 몸에 갑자기 이상이 왔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입에 침이 마르고 명치가 답답해 왔다. 휴게소에서 급하게 먹은 음식이 체한 것이 분명했다. 수지침으로 따고 소화제를 먹고 가슴을 문지르고 별 짓을 다 해 보았으나 별무 효과였다.
이 지점에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산행을 계속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나 혼자 아픈 몸을 이끌고 대구로 돌아온다는 것이 마음에 켕겼다. 산에서 내려오거나 산을 넘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내가 알아서 판단해야 했다.
나는 산행 팀과 동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산행코스의 3분의 1도 안 되는 지점에서 내가 주저앉고 만 것이다.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다. 바람은 세차게 불고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렸다. 모두 손이 얼어서 자기 물건 하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사람의 목숨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 명의 동료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이었다. 구급약통을 꺼내 약을 먹이고 젊은 청년들은 내 사지를 떡 주무르듯이 주물렀으나 별 효과를 내지 못했다. 내 몸은 허벅지부터 발바닥까지 굳어왔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도 못 하고 힘센 청년들의 손에 내 몸은 맡겨져 있었다.
팔다리 주무르기를 삼십 여분 만에 약간 풀리긴 했어도 (걷기엔 무리였다.)걸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서너 시간을 더 걸어가야 한다는 중압감이 내 몸을 더 굳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내발로 걸어 [가야하고] 종주를 해야 (했기에 이을 악물고 걸었다.)했다. 근육이 굳었다 풀리기를 수십 번 반복하면서 다섯 시간 종주코스를 일곱 시간 만에 완주했다. 내려와서 생각해 보니 삶과 죽음이 한 장의 책장 넘기는 것 하고 다를 바가 없었다.
아플 때는 부끄러움도 체면도 없었다. 산에서 내려와 긴장이 풀리고 굳어진 다리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일행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리 와 기다리던 회원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하산 주를 마시다가 다가와 나의 몸 형편을 물었다. 부끄럽고 미칠 것만 같았다. 그제야 사람의 얼굴이 조금씩 또렷하게 보였다.
그 이후로 내가 산을 오를 때마다 치악산 산행을 떠올리곤 한다. 내 나이와 체력을 감안하지 않고 객기를 부렸던 치악산 산행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내 몸을 내가 모르고 산다면 세상 헛산 것이나 무엇이 다르랴. 공연한 객기를 부려서 회원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힘든 산행을 하게 한 것이다. 객기를 부려서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객기를 부리면 잘못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게 우리네 인생사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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