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게 안부를 묻다 / 서숙
이 거리에 온 게 얼마 만인가. 엄청 낯이 익으면서도 엄청 낯이 선 이 기묘한 이중적인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애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웃음 머금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얼굴이 하얗고 눈이 큰 네가 저만치서 걸어오는 걸 보고 있는 게 좋아." 나는 피부가 그다지 하얗지도 유난히 눈이 크기도 않은데.' 속으로만 생각헀다. 네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그런 마음이었다. 그때 그 애의 표정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거리에서.
어느 날이었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모르는 이가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쌍둥이 아니세요? 제가 너무 궁금해서요." 나와 아주 많이 닮은 사람을 여기에서 여러 번 봤는데 동일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아마 저 맞을 거예요. 제가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하거든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종종 못 알아보곤 하더라고요." 그녀는 그런가? 반신반의한 표정이었고 아무튼 우리는 우연히 길에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친구가 되었다. 소녀에서 아가씨로 건너가는 길목의 시절이었다. 나는 재수생이었고 그 애, 민영이는 교대에 다닌다고 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서로의 집에 가본 적은 없다. 가끔 아주 가끔 민영이가 전화를 해서 만났다. 그녀는 집 근처를 벗어나 뚝 떨어진 곳에서 만나기를 원했다. 집에 전화도 없다고 했다. 이사도 자주 다닌다고 하면서 "가난해서 오빠가 힘들어해."." 자기가 힘들다는 말 대신에 혼잣말처럼 낮게 말했다. 동생들이랑 먹고살기가 힘든데 부모님의 건강도 여의치 않아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앞날이 막막한 것 같았다. 내가 근심스러운 기색을 보일라치면 그녀는 얼른 해사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자신을 내보이고 싶어서 나를 불러냈을 텐데 정작 깊은 이야기는 꺼내놓지 않았다. 자기의 딱한 처지를 언뜻 비추면서도 감추던 모습은 걱정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신비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녀에게선 항상 어떤 적극성이 느껴지곤 했는데 가지런한 치열을 보이는 환한 미소 속에서도 불현듯 쓸쓸함이 묻어나곤 했다. 나는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어쩌다 한 번씩 불쑥 내 앞에 나타나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녀의 정체를 추측하곤 했다.
이 거리의 뒤편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한강이 흐른다. 그런대로 낙천적이었던 둘은 팔짱 끼고 강변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팔짱 끼는 것조차 네가 먼저였다. 나는 늘 수동적이었지.' 그녀가 일방적으로 나를 불러내어 끊임없이 무슨 말인가를 했고 나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어느 날 친구는 구멍가게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크래커를 덮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정성스럽게 차곡차곡. "이렇게, 꼭 이렇게 한번 해주고 싶었어." 내게 건넸는데 그 동작과 말씨가 무척 진지했다. 지금도 나는 아이스크림을 그런 식으로 먹는 것을 즐긴다. 그러면서 그녀를 회상한다. 내게도 나를 그렇게 풍부한 표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지켜봐 주던 존재가 있었다는 기억이 뿌듯하고 포근하게 감싼다.
나를 만나는 게 그녀에게 어떤 위로였을지. 위로였다고? 그것도 자신이 없다. 그녀의 형편을 딱하게 여기는 내 기색이 전해졌을 것인데 그것은 우리의 만남에서 그녀가 기대한 것은 전혀 아닐 것이다. 다만 나의 동정심이 친구의 자존심을 그다지 상하게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가락국수 등 주로 우리가 먹던 분식 값을 꼭 자기가 냈다. 완강했다. 한 푼 두 푼 소중하게 모아서 나와의 시간을 준비했던 건 아니었을까. 돈이 마련되면 나에게 전화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날부턴가, 그녀는 새로 다니게 된 교회에 대해 열심히 말했다. 그 무렵의 언저리에 그녀는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았는데 아마도 새로 운 빛을 따라 걸어갔을 것이다. 나는 그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마냥 시간은 흘렀다. 그뿐이었다.
우연히 지나치게 된 이 거리에서 문득 그녀가 나를 사로잡는다. 새 건물이 들어서고 상호가 바뀌어 이 길 위의 그 무엇도 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지만, 또 묘하게도 변한 것이 없는 것도 같다. 적당히 누추하고 적당히 번잡했던 이미지가 그다지 변함이 없어서인가 보다.
그렇더라도 지금 이 거리에서 그녀를 만난다고 한들 서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낯익고도 낯선 거리에서 그녀의 생김새를 떠올리며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나도 모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서 '하얀 소녀에 대한 동경'의 허상으로 위안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은 반드시 허상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겠다. 진정한 나의 모습이란 진즉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화장을 지운 내 모습이 화장을 한 내 모습보다 더 진실한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강렬했으나 쉽게 사라지는 기억도 있고 당시보다 오히려 강화되어 깊어지는 흔적도 있다. 내 안의 어떤 쓸쓸함이 민영이를 못 잊게 하나 보다. 그녀도 나를 기억할까. 자기를 기억하는 나를 알고 있을까. 내가 자기를 기억하며 허전한 마음인 것을 알까. 나는 그녀가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내가그녀보다 우리의 일을 더 오래 기억하는 것이라면 나의 오래된 마음의 빚이 갚아지는 걸까.
너는 다니던 교대를 무사히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 삶의 전환점을 마련하였기를, 나는 내 기억을 소중히 간직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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