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길을 따라서 / 백승분
소리에는 추억이 있다. 기쁨과 슬픔이 있고 편안함과 불안함이 있다. 소리의 정체를 알고 듣는 것과 모르고 듣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후자는 때로 왜곡되고 과장되기도 하지만 상상의 날개가 있어서 훨씬 깊고 넓다. 소리 중에서도 자연의 소리는 편안하다. 가슴 깊은 곳 무의식에 스며들기에 숨겨진 상처까지 보듬으며 서그럽고 늡늡한 사람이 되게 한다. 명상가들이 자연의 소리를 찾아 나서는 것도 어떤 유명한 음악보다도 빠르게 몸과 마음이 이완되어 깊은 명상 상태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 소리길. 산책길 내내 들리는 소리가 마음의 영양제가 된다. 눈과 귀로 흡수해야 할 영양제가 지천이다. 욕심부려 급하게 서두르면 제맛을 모른다. 그저 나무와 바위, 물 일뿐이다. 호기심 많은 아이가 되거나 모든 걸 달관한 신선의 흉내라도 내며 가다 보면 풍경과 소통이 된다. 나무 향내가 마중 나오고 무심하던 바위도 자리를 내어주며 쉬어가라고 붙든다. 물도 속내를 보인다.
함께 나서는 식구가 많으면 미리 예약해서 해설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것이 좋다. 식구가 단출하면 안내서를 꼼꼼히 읽으며 보물 찾기를 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소리길은 품이 넓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다 품는다.
인간의 정신이 활짝 펼쳐지기 위해서는 텅 빈 운동장이나 흔해 빠진 야생초 같은 무자극성이 중요하다고 한다. 가족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크고 대단한 것을 찾을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게 좋다. 어쩌다 한두 번 외국여행이나 비싼 레스토랑에 가는 것보다 자질구레한 집안일 함께 하기, 가까운 산과 계곡 찾아가기 등 시시해 보이는 일이 정을 더 두텁게 만든다.
조붓한 논둑길을 걷는다. 따가운 햇볕의 환영인사가 만만치 않다. 관심을 두지 않으니 걸을 만하다. 몸은 덥다고 아우성이지만 소리에 마음을 보내버렸으니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등에 매달린 배낭 속에서 물통 소리가 찰랑찰랑 장단을 맞춘다. 들판의 초록 소리를 듣는다. 바람을 즐기고 있는 벼들의 몸짓이 전염되어 나도 따라 흔들린다. 성질 급한 녀석이 꽃가루를 흩날린다. 금가루인 듯 달고 있는 꽃가루를 쪼그리고 앉아 자세히 쳐다본다. 쑥쑥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 저만치 앞서간 시간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에 멈춘다. 요즘은 건강식이니 뭐니 해서 그리 대접받지는 못하지만 추억이 있어 생각만으로도 입맛이 돈다.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논둑 가장자리에서 달개비가 손톱만 한 꽃잎을 흔든다. 파란 모자에 노란 입술이 미키마우스를 닮았다. 삐죽이 내민 하얀 수염이 잔망스러워 꿀밤을 한대 먹인다. 들판을 눈 속에 다 넣었더니 배가 부르다.
뙤약볕을 지나 동네 앞이다. 장난감 같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졸고 있다. 고요하다. 햇볕이 벼를 돌보는 동안 어른들은 잠시 제금 난 자식들을 찾아간 것인가. 노인정도 조용하다. 개도 짖지 않는다. 낮잠을 방해한 나그네를 멀뚱히 쳐다본다. 아마 잠이 덜 깬 모양이다. 들판에서 따라온 간들바람이 이집 저집 기웃거린다. 접시꽃이 긴 목을 어쩌지 못해 살짝 꼬고 서서 낯선 손님을 수줍은 듯 훔쳐본다. 고운 빛이 동네를 환히 밝힌다. 친정 나들이 온 새댁이 된 느낌이다.
개울을 끼고 숲길이 펼쳐진다. 나무계단을 지나고 흙길을 걷는다. 통통 사각사각 부드러운 소리가 뒤를 따른다. 촉감이 발바닥을 타고 몸으로 퍼진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의 소리에 익숙해 있던 귀가 움찔한다. 이제 햇볕은 출입 금지다. 두꺼운 나무그늘이 이어진다. 무릉도원에 들어선 모양인가.
시원한 물줄기가 몸을 금방 식힌다. 물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갑자기 소란스럽다. 넓은 개울을 지나 좁은 곳에 다다르니 서로 먼저 가겠다고 티격태격한다. 귀엽다. 이젠 낭떠러지다. 큰 바위 사이에서 서슴없이 뛰어내리며 묘기를 보인다. 기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힘이 넘친다. 하얗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눈길인 듯 착시를 일으킨다. 넓은 곳에서 여유롭게 돌을 비켜가고 작은 나무를 돌아가던 부드럽고 배려심 넘치던 그 물이 맞나 의심이 갈 정도다. 저도 무섭겠지. 소리라도 질러야 머뭇거리지 않고 뛰어내릴 용기가 생기리라. 내 속에 너무도 많은 나를 다스리지 못해 변덕쟁이가 되는 나를 보는 것 같다. 동지애가 느껴진다.
다리 난간에 서서 눈을 감고 폭포 속으로 빠져든다. 사정없이 무언가를 던지는 것 같기도 하고 열띤 응원 소리 같기도 하다. 전신이 오싹하다. 시원함인지 공포인지 한기를 느낄 즈음 추억으로 들어간다. 폭포 아래서 발을 적시며 아이가 되어 찰박찰박 걷는다. 발바닥에 밟히는 굵은 모래의 자극에 몸이 저릿하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사운 댄다.
길이 물을 따돌린다. 계곡을 비켜서니 산의 소리가 웅성웅성 들린다. 층층나무, 노각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팔배나무 등 이름도 생소한 나무들이 바람의 도움으로 각자 역할을 찾아 화음을 잘도 이룬다. 새들도 제각각 다른 악기를 연주한다. 질투가 났던지 매미가 소리를 지른다. 소프라노다. 짧은 생이라 봐 주겠다는 숲속 식구들의 배려를 감지한 모양이다. 무질서 속에 질서가 느껴진다. 물소리와는 또 다른 소리가 가슴을 쓰다듬는다. 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맡긴다.
소리길에는 귀만 즐거운 게 아니라 눈도 즐겁다. 눈부처를 만들어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가야산 19명소 중 16개 명소가 있다.
칠성대 맑은 물속에 자신을 비춰본다. 꾀죄죄한 모습인 줄 알았는데 그 세 물과 한몸이 된 건가. 환하다. 최치원 선생이 여러 제자와 시를 짓고 바둑을 두었다는 농산정에서 시심을 찾는다. 맑아진 마음 자체가 시가 아닌가. 낙화암에서 떨어진 꽃잎이 모이는 소를 의미하는 낙화담, 꽃잎의 속살거리는 소리가 궁금증을 일으킨다. 암석이 층층이 쌓여있는 첩석대는 바라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그건 보는 사람의 마음일 뿐. 오랜 세월 비바람에도 끄떡없다며 믿음직한 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회선대로 향한다. 신선은 만나지 못하고 내가 신선인 듯 바위에 앉아 창이라도 한 자락 뽑고 싶다.
물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해인사 입구가 나타난다. 해인사와의 만남은 훗날로 미루고 오던 길을 천천히 돌아내려 온다. 방금 지나온 길이건만 돌아나가니 다른 모습이다. 다른 소리가 들린다.
소리바다에 몸과 마음을 맡기니 찬물을 마시지 않아도 시원하고 따끈한 차 한 잔이 없어도 뜨겁다. 점심때가 한참 지났지만 시장기도 잊었다. 소리길은 휘청거리는 삶에 잠시 앉아 숨 고르기를 하는 의자가 되리라. 소리길은 마술사다. 마음을 말끔히 씻어 행복한 나를 찾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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