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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섣달그믐밤 / 허창옥

섣달그믐밤 / 허창옥

 

 

 

임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오십 보쯤 떨어진 곳에 앉아서 그의 곡진한 시선을 느끼고 있다. 그는 나를 찬찬히 헤아리고, 나는 그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본다. 그의 고뇌가 무엇인지를 백성의 눈도 어미의 가슴도 아닌, 한 인간의 마음으로 짚어본다.

그의 휘는 혼(琿)이며 조선 15대 임금이다. 어느 왕자가 세자가 되느냐로 신하들이 밤낮으로 싸웠다. 마침내 왕이 되었으나 서출의 올가미는 촘촘하고 단단했다. 그의 영민함은 차츰 흐려지고 분노가 칼날처럼 벼려졌다. 어린 동생을 죽이고 그 어미를 폐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하여 광해군으로 강등되었으나, 그것은 나중의 일이며 지금의 그는 어진 군주이다.

임금의 가슴에 얹힌 맷돌은 무겁다. 시종들이 밤을 꼬박 밝히며 그를 지키고 있지만 그는 두려움에 휩싸여있다. 상소들, 간언들, 산적한 난제들로 인해 그의 숨결은 거칠고 왜, 명, 청 사이에서 그의 고뇌는 깊어만 간다. 칠흑 같은 섣달그믐밤, 임금은 그래서 외롭다.

이 밤에 내가 임금을 불러낸 까닭은, 그가 아직 임금이었던 어느 해 과거시험에 “섣달그믐밤의 쓸쓸함에 대하여 논하라”를 시제로 내렸다는 사실을 불현듯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그를 생각하자 그의 쓸쓸함이 내게로 와서 무너지고 사무친다. 임금과 내가 생각하는 바, 해야 할 바가 매우 다를 것이기에 그의 고뇌와 나의 고뇌는 사뭇 다를 터이다. 하지만 섣달그믐밤에 한 인간에게 사무치는 쓸쓸함이야 무에 그리 다르랴.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잘했거나 못했거나 해는 저물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잠시 서 있다가 계단으로 몸을 돌렸다. 지쳐있었는데 무슨 심사인지 스스로도 몰랐다. 3층서부터 숨이 찼고, 7층쯤에서 종아리가 당겨서 무릎을 짚고 쉬었다. 9층에선가 허리에 손을 얹고 몸을 젖혔다. 그렇듯 헉헉대며 20층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12층으로 내려왔다. 저녁 여덟 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몇 가지 일을 더 처리하고 늦은 밤이 되었다.

몸과 마음이 함께 고단하다. 거실에 놓인 다탁에서 뜨거운 메밀차를 마셨다놓았다 하며 창밖을 내다본다. 자동차헤드라이트들이 길고 긴 빛의 줄기를 만들고 있다. 가로등불빛들은 강물에 주황빛으로 누워 있고, “멋진 나라 대한민국” “하이마트” 옥상간판 글씨들이 선명하다. “7천9백만 원” 뜻이 모호한 숫자도 커다랗게 보인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그믐밤을 수많은 전등불빛이 대신 밝혀주고 있다. 밤은 그러므로 환하다.

세찬 바람이 창에 부딪쳐 울어대는 밤, 문득 누군가가 미어지게 그리운 밤, 낮에 보았던 새들이 어디에서 잠자고 있는지 그 향방이 묘연한 밤, 밝아올 날에 맞닥뜨리게 될 일들이 두렵다. 그 절대고독 속에 임금과 내가 앉아있다. 그도 혼자고 나도 혼자다.

“섣달그믐밤의 쓸쓸함, 그 까닭은 무엇인가” 제목을 쓴다. 첫 문장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4백 년 전의 임금이 나를 보고 있다. 지필묵대신 컴퓨터를 마주보고 있는 늙은 나를 젊은 군주가 낯설게 그러나 다정하게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다. 혼자인 내가 혼자인 그에게 답한다.

나랏일이 지난하고, 백성의 안위가 천근의 근심이며, 날로 드세지는 정쟁 때문에 권좌가 등불처럼 흔들리니 고뇌가 어찌 아니 깊겠습니까. 또한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고통과 불안이 당신을 짓누르고 있겠지요. 패배에 대한 두려움, 일련의 현상에 대한 부정(否定)적 심경이 당신을 괴롭히리라 여깁니다. 한 해를 보낸 안도와 휴식보다 맞아야할 시간 앞에 당신은 떨고 있습니다. 저녁에 집에 들면서 저는 일부러 계단을 올랐습니다. 몸은 어렵잖게 집에 이르렀으나 디뎌야할 수많은 계단이 여전히 앞에 놓여있었습니다. 막막했다면 이해하시겠는지요.

당신과 저는 4백 년의 시차를 두고 각각의 근심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말씀드리건대, 한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은 임금과 필부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계와 동떨어져서 홀로 앉아있는 밤, 고뇌는 철저히 혼자만의 것이 됩니다.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겨내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의연해야 합니다. 이런 말들이 당신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임금이시여, 미치지(及) 못하는 변설로 덧붙입니다. 당신의 하늘은 달빛이 없어서 캄캄하고, 저의 하늘은 전등불빛으로 대낮같이 밝습니다. 너무 캄캄한 밤도, 지나치게 밝은 밤도 인간을 몹시 쓸쓸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까닭도 탓도 오직 밤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섣달그믐밤이겠습니까.

섣달그믐밤이 하도 길어서 오래전 이 밤에 몹시도 쓸쓸했을 젊은 임금과 그 하염없음을 나누려하였다. 임금은 그러나 홀연 사라지고, 휘청거리며 살아온 내 모습만 불빛아래 또렷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