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 조경숙
조선 시대 화가 신윤복의 작품 <기다림>을 본다. 설핏 부는 바람에도 능수버들이 흔들리는 어느 봄날 풍경이다. 트레머리를 한 여인이 길모퉁이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는 폼으로 보아 누군가를 기다리나 보다.
어딘지 모르게 긴장되고 초조해 보인다. 버드나무 잎 스치는 소리에도 깜짝 놀라 가슴 조였을 여인.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든 것이 봄기운 탓만 아닐 것 같다. 인제 그만 돌아갈까. 아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거짓말처럼 나타날지도 몰라. 살짝 들려진 신발 코가 애태우는 그녀의 심정을 말한다. 주름이 많은 치마 위에 뽀얀 앞치마를 둘렀을 뿐인데도 곱고 단아하니 여염집 아낙 같다. 누구를 기다리나 궁금하던 차에 여인의 손에 스님이 쓰는 모자인 송낙이 들려있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스님이라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간 사람이 아닌가.
미망인이었을까. 하필이면 스님이 탁발하러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얄밉게도 에로스가 큐피드의 화살을 날리다니. 그것도 하늘도 땅도 사랑에 빠진다는 봄날에. 그게 운명이었을까.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이 다 행복해 보인다. 골목길에 코 찔찔 흘리는 아이도 어여뻐 미소를 보내고 심지어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한다. 하늘이 푸른 것도 꽃이 피는 것도 모두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치맛자락만 흔들려도 입방아에 오르는 시절에 스님과 사랑은 험한 길이다. 스님은 자기를 은애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그녀는 스님을 만났을까. 만났다면 스님은 파계하고 여인과 사랑을 이루었을까.
부녀회 주최로 아파트에서 요가를 가르쳐 준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구청에서 요가 강사에게 실비를 제공하고 아파트 주민들은 무료로 배울 기회였다. 반장인 나는 참가 인원을 채우기 위해 새로 이사 온 위층에도 문을 두드렸다. 젊은 여자와 노인이 단둘이 산다는 소문에 당연히 시집 안 간 노처녀가 친정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줄 알았다. 자잘한 꽃이 수놓인 앞치마를 두른 그녀 뒤로 텔레비전 시청하는 노인이 보였다. 나는 부녀간에 참 보기가 좋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 미묘한 기운이 그녀의 얼굴에 스쳤다. 나는 당황했다. 무슨 말을 덧대어야 할지 난감했다. 자기가 본 하늘만큼만 생각하고 산다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어색함 속을 빠져나오느라 인사도 하지 않고 허둥지둥 내려왔다.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정 고무줄로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요가 수업에 왔다. 첫 수업이 끝나고 대부분 사람이 돌아간 뒤였다. 뒷정리하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그 젊은 여자 말이야.” 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위층 여자 이야기였다. 그녀는 대학 재학 시절에 지금의 남편인 교수를 사랑했다. 그녀 나이 겨우 21살. 교수는 이미 결혼하여 장성한 아들까지 둔 중년이었다. 그림 속 여인이 송낙을 들고 고목이 된 버드나무 뒤에 서서 스님을 기다렸다면 그녀 또한 매일 교정 한 귀퉁이에서 교수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고 한다. 할머니는 부인과 이혼하고 젊은 제자를 택한 교수를 탓하지 않고 위층 여자를 불여우로 몰아세웠다. 젊은 시절 영감님이 바람을 피워 속깨나 썩었다는 한 할머니는 그 불여우와는 같이 요가를 할 수 없다며 핏대를 세웠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뿐이었겠나. 주홍글씨는 세월이 흘렀어도 색이 조금도 바래지 않은 것 같다.
콩깍지 때문에 사랑에 눈이 먼다고 한다. 그때 페닐에틸아민과 엔도르핀 이란 호르몬이 분비되어 계속 보고 싶은 욕망이 발생하지만, 호르몬의 분비가 낮아지면 바로 마법에 풀려 장점도 단점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러기에 사랑의 유효기간은 고작 3년을 넘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시간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젊고 패기 넘치던 남자도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 텐데 노인이 되도록 함께 살아왔을 여인이 참 댕돌같이 보였다. 하긴 세월이 흐르면 사랑보다 정으로 또 의무로 살아간다지 않는가.
먼발치에서 건성으로 보았던 위층 노인을 엘리베이터에 단 둘이 타게 되었다. 갑자기 코를 자극하는 시궁창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다. 안보는 척하면서 가재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리되지 않은 수염이 마스크 사이를 비집고 나와 있었다. 냄새는 푹 눌러 쓴 모자와 두툼하게 입은 코트 안에서 사정없이 발산되었다. 어눌한 말이며 몸짓으로 보아 노인은 분명 치매를 앓고 있었다. 그녀에게 늙고 병든 그를 돌봐줄 사랑도 의무도 정도 남아 있지 않은 게 분명하다. 차라리 그때 서로 떠나보냈다면 어쨌을까.
나는 송낙을 들고 선 여인 옆에 서서 꺾어진 골목 어귀를 함께 바라본다. 그녀는 하마 올까 속절없이 기다리고 나는 제발 오지 말라고 소리치며 동동거린다. 그때 봄바람이 내 귀를 간질이며 스친다. 한 번이라도 설레는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그 심정을 어찌 알겠느냐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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