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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겨울에 만난 선비 / 靑石 서정길

겨울에 만난 선비 / 靑石 서정길

 

 

현풍읍 솔례率禮마을에서 오솔길을 한참 걷다 보니 야트막한 산자락에 이양서원尼陽書院이 모습을 드러낸다. 비에 젖어서일까. 곱기만 하던 단풍은 어느새 속절없이 떨어져 비탈 여기저기에 누워있다. 잎을 떨군 나무들은 밀려드는 한기에 가늘게 떨고 있고 담장에 몸을 기댄 배롱나무도 잿빛 하늘의 무게를 인 채 묵묵히 서원을 지키고 있다. 바빠진 내 발걸음을 따라 낙엽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뒤따른다. 쪽문을 열고 들어서자 알몸의 배롱나무가 나를 반긴다. 여름철 화사한 꽃도 무성하던 잎으로 몸매를 숨긴 것과는 영 다른 모습이다. 알몸으로도 당당한 건 육체미 선수인 양 미끈한 근육질 때문이리라. 우람한 몸매는 좌중을 압도할 만큼 여유가 있어 보인다. 살아온 연륜만큼 무언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있음이다.

지난해 여름, 활짝 핀 백일홍에 반해 이곳 이양서원을 찾았다. 작은 뜰에는 백 년을 넘겼을 배롱나무가 환한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담장 위로 주홍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한 아름다움에 마음이 빼앗겼다. 서원 지킴이 노인장은 현풍 곽씨 일가의 덕행과 학문이 붉은 꽃으로 핀 것이라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보다는 등전풍화燈前風火와 같은 나라를 위해 싸웠던 망우당 홍의장군의 기상이 붉은 꽃으로 피어난 것만 같았다. 한참을 응시하고 있노라니 선경에 선 듯 묘한 분위기가 나를 압도했다.

여름이면 배롱나무는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에 몸을 태워 스스로 담금질 한다. 혹독한 수련 덕분에 잉걸불 같은 꽃을 백일 내내 피운다. 그 어떤 나무도 열정을 따를 수 없으리라. 쉼 없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핏빛으로 피어있다. 넋을 잃을 정도로 농염하다. 줄기는 하얗게 타들어 가 순도 높은 백탄이 된다. 그토록 몸을 단단하게 다듬는 이유가 뭘까. 매서운 칼바람을 이겨내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추위가 더할수록 윤기 나는 하얀 피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혹자는 자작나무와 닮았다고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흰 피부는 유사하나, 배롱나무와는 삶의 궤도를 달리한다. 겉만 번드레한 자작나무는 자유분방한 외모와는 달리 커갈수록 심술쟁이가 된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영역을 넓히고 햇살을 독차지하려 아등바등한다. 오로지 나만 생각할 뿐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삶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독한 이기주의 근성을 지졌다. 약하다 싶으면 사정없이 짓밟는다. 겨울이면 영역 싸움을 치열하게 벌이고 몸을 흔들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혈투를 벌인다. 연륜이 더해질수록 옹이는 유난히 크고 짙어 검버섯처럼 흉하다. 검게 변한 표피에는 상흔이 문신처럼 널브러져 있지만, 배롱나무는 상처조차 부드럽게 감싸준다. 발가벗은 배롱나무에 다가가 이곳저곳 몸매를 훔친다. 윤기 나는 피부가 부럽다. 잔가지가 사방으로 휘어지고 또 다른 가지는 뒤틀려있어도 서로 엉킴이 없다. 촘촘하면서도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주는 매력을 지녔다.

배롱나무의 기품은 금방 지은 도포를 잘 차려입은 선비를 닮아 흐트러짐이 없다. 더구나 겨울철 배롱나무는 도자기陶瓷器의 품성을 빼닮았다. 도공이 만든 불가마 속에서 눈부신 빛과 열에 용해되어 태어난 백자와 흡사하다. 신열 같은 열기를 송두리째 흡입하였기에 표피조차 은은하게 빛난다. 서원의 배롱나무는 소박하면서도 단아함이 배어나고 균형 잡힌 가지의 곡선미는 바라볼수록 편안함을 준다. 자신의 모든 걸 숨김없이 드러내지만, 결코 뽐내거나 과시하지 않는 절제된 선비의 삶이 묻어난다.

어릴 적 배롱나무를 백일홍이라 불렀다. 꽃에서 풍기는 강렬한 색채는 화려한 조명 아래 춤추는 무희의 입술처럼 요염하다. 현란한 몸짓은 지치지도 않고 백일 동안 계속된다. 하지만 함부로 꽃을 피우지 않는다. 한 폭의 그림을 그릴 때 여백을 두는 화가처럼 배롱나무도 꽃가지 사이에 간격을 두어 절제된 관능미를 뽐낸다. 언제 봐도 호감이 가고 누구와도 잘 어울릴 것만 같다. 호젓한 호숫가 정자를 지키며 환한 웃음을 지어도 좋고 산사의 풍경 소리에 붉은 영혼을 실어 보낸다 해도 멋질 것이다.

매서운 삭풍을 견뎌야 하는 수많은 나무는 꽃과 잎을 지상에 내려놓고 나면 거친 피부를 그대로 드러낸다. 웅장한 느티나무도 황금빛으로 유혹하는 은행나무도 겨울이면 다가서기가 꺼려진다. 하지만 배롱나무는 나신으로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 한파가 몰아치는 밤이면 들숨으로 뿌리에 머무르고, 낮이면 날숨으로 가지 끝 잎눈에다 온기를 닿게 할 것이다. 내공이 쌓일수록 유연한 몸짓이 돋보인다. 타고난 예술적 감각으로 가지를 펼치는 기술은 신기에 가깝다. 뒤틀린 가지 하나하나가 행위 예술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배롱나무를 살짝 안아본다. 얼음장 같이 차가우면서도 작은 박동이 전신에 전해진다. 단전 깊숙한 곳에는 용광로 같은 열기를 담고 있음이다. 생명을 키워내는 내공이리라. 머지않아 앞 다투어 핀 봄꽃이 질 무렵에 은밀하게 연록의 잎을 틔워 낸 다음 잎들의 향년이 무르익는 7월이면 가지마다 붉은 꽃망울을 달아 선비의 품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될 것이다.

세상일에 민감하게 살아온 자신이 떨어진 낙엽처럼 초라하다. 이 추위가 가기 전에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을 배롱나무 한그루를 심어 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