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침(浮沈) / 김순경
일장춘몽이다. 꿈처럼 다가왔다가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모든 일에는 흥망성쇠가 있지만 눈앞에서 이렇게 펼쳐질 줄은 몰랐다. 칡넝쿨처럼 거침없이 뻗는가 했더니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서서히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이 다 사라졌다.
가끔 친구 회사에 들렀다.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이었다. 중고 기계 몇 대로 허름한 건물에서 시작했지만 조선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을 거듭했다.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자 공장을 이전하면서 사세를 불렸다. 대기업 일을 잘 해내자 까다로운 선진국 주문도 밀려왔다. 덩치 큰 철강 기계를 수출하면서 회사 이름도 널리 알렸다. 남들이 꺼리는 중공업 기계도 서슴없이 도전했다. 기술이 부족하면 사람을 스카우트해서라도 반드시 잘 마무리했다. 그 회사가 일 년 전 부도났다.
제자들이 많이 일하던 회사도 한 달 전에 부도가 났다. 경험이 없는 부실회사의 인수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종업원을 줄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부실의 빚더미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인수한 회사가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자 잘 돌아가던 회사마저 휘청거렸다.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허사였다. 쓰러져가는 회사를 도와줄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흑자가 날 때는 오지 말래도 찾아오던 은행들이 발길을 끊자 일감도 현저하게 줄었다. 수주와 자금 때문에 동분서주하던 사장도 점점 지쳐갔다. 사정이 악화되자 겨우 숨만 쉬던 두 회사가 동시에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왕고모 집은 부자였다. 처음 그 집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어린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양옥집이었다. 철 대문을 열자 말로만 듣던 정원이 나타났다. 단풍나무가 하늘을 가리는 정원에는 모란과 함박꽃이 가득했고, 채송화가 널브러진 꽃밭 연못에는 금붕어가 한가롭게 꼬리를 흔들며 놀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일제 TV에서 생전 처음 레슬링 경기를 보았고 독일제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웅장한 교향곡도 들었다. 나는 정원이 내다보이는 서재의 대형 피아노 의자에 앉아 처음 보는 책을 신기한 듯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 집도 잘 돌아가던 공장이 부도나자 재물도 사람도 어디론가 떠나갔다.
고향에도 그런 집이 있었다. 예전에 잘 살았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집들이 있다. 가을이면 소작농이 곡식을 가득 채우는 집 주인은 언제나 말쑥한 차림이었다. 논은 많지만 논에서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지게 한 번 지지 않아도 나뭇가리는 집안 그득했다. 시골에서는 공부가 안된다며 도회지로 전학 간 그 집 아이들은 방학이면 하얀 얼굴로 고향에 나타났다. 얼굴이 새까만 친구들과는 점점 멀어졌고 눈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공부해야 한다며 도시로 돌아갔다. 시골과 도시의 중간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지내던 그 친구는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이루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할아버지는 가끔 이 말을 밥상머리 주제로 올렸다. 살림을 늘리고 가문을 세우는 일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다는 말이다. 할아버지도 살림을 지켜내지는 못했다. 불리기는 했지만 오래 지키지는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섯 마지기 논을 서른 마지기로 늘렸고 없던 산이나 밭도 사들였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파도처럼 세차게 밀려온 밀물은 빠르게 빠져나갔다. 재물은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도 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매스컴에는 연일 희망적인 말들로 넘쳐난다.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벌어진다. 믿을 수 없는 파격적인 모습도 연일 일어난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한편으로 우려하는 사람도 많다. 예전처럼 또 급선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으로 편중되지 않고 상생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나친 기대 뒤에는 늘 실망이 뒤따랐다. 과대포장은 잠시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본질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한다. 무슨 일이든지 즐거움과 고통은 함께 한다. 크게 실망하지 않으려면 흥분된 가슴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승승장구할 때는 앞만 보고 간다. 날아가는 새가 뒤를 돌아보지 않듯이 높고 멀리 날것만 생각한다. 비바람이 거세게 불거나 태풍이 와도 앞만 보고 난다. 경험이 부족하거나 오만한 생각이 넘치면 무모하리만큼 겁 없이 도전한다. 급하게 떠오르는 상승기류는 세상을 다 덮고도 남을 것 같지만 태풍처럼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만리장성도 무너지고 붉은 자금성 벽도 퇴색되고 손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요새일 뿐이다. 아무리 강한 성벽이나 돌담도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조금만 관리를 소홀히 하면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잘 될 때 조심해야 한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힘들 때는 남의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이지만 잘 나갈 때는 그렇지 않다. 몇 번 성공하다 보면 세상이 만만해 보이기 때문이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충고는 앞길을 가로막는 시샘으로 여긴다. 부족한 점을 일러주는 사람이 스승이라는 말도 소용없다. 자신감이 풍선처럼 부풀어 자만에 빠지면 결국 터지고 만다. 웬만큼 내공이 쌓이지 않으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무리수를 둔다. 초심을 잃지 않고 늘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나친 욕심은 모든 것을 잃게 한다. 돈도 명예도 마찬가지다. 작은 권력이라도 손에 쥐면 세상을 얕잡아보고 설치는 사람이 많다. 가서는 안 되는 길이나 갈 수 없는 길을 가려는 사람도 있다. 분수를 지키라고 하지만 욕심의 늪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한다. 분수를 모르고 설치다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부와 명예도 끝까지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름처럼 천천히 다가왔다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세상 모든 것이 부이처럼 가라앉고 떠오르며 끝없이 자맥질을 한다. 산이 제 모습을 드러내자 자욱하든 안개가 하늘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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