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 박영순
사월이 왔다. 꽃들은 피어나기 시작했고 봄바람은 내게로 불어 닥쳤다. 그 바람은 은근히 나를 밖으로 몰아내었다. 초순이라 목련은 져가고 벚꽃만이 한창일거라고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가창 댐 부근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가로수 벚꽃이 피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분간이 어려웠다. 분홍빛만은 눈길을 끌었다. 차를 타고 가며 세 사람은 피는 꽃을 보러 왔는지, 지는 꽃을 보러 왔는지 모르겠다며 한참 동안 의견이 분분하였다. 차를 주차하고 벚나무 가까이 다가가서야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꽃망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내보다 조금 늦게 개화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를 돌아보니 주차장에는 한 그루의 목련이 봄날의 화신인 양 미소를 머금고 환하게 서 있었다. 몇 개의 꽃잎만이 땅에 떨어졌을 뿐, 나무 전체가 거꾸로 하트 모양을 그리며 사랑을 고백하는 듯 했다. 이런 순간은 잘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라며 꽃과 같이 인증 사진을 몇 장 남겼다.
주위를 밝혀주는 목련꽃과 가로수의 앙증맞은 벚꽃을 보면서 그것들의 낙화를 떠올려 보았다. 목련꽃처럼 큰 꽃이 떨어져 땅에 뒹구는 모습과 벚꽃처럼 작은 꽃이 떨어져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견주었다. 마치 사람들이 살다가 떠나고 난 뒤의 모습과 닮았다. 무릇 세상에서 큰 사람이라고 타의 추종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그들의 떠난 자리가 목련꽃 떨어진 모습으로 비춰져 보였다. 멍들어 거무스름한 색이 빨리 마르지도 않고 물러 터져 눈에 거슬리는 것처럼. 큰 사람이 살았을 적엔 많은 이들로부터 추앙을 받아 축복 속에 살았더라도 훗날, 그의 뒷모습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더럽혀진 모습이라면 그의 인생은 백목련의 낙화와 다를 바 없다. 백목련의 고운 빛 뒤에 오는 추한 모습에서 깨끗한 모습이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작은 꽃처럼 살다간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한낮 바람결에 날려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어도, 내가 어떠했노라고 애타게 부르짖지도 않는다. 벚꽃이 만발하여 떨어질 무렵, 벚나무 가로수 길을 걸어 본 사람들은 알리라. 점점 옅은 분홍 꽃은 만개한 꽃이 되어 소리 없이 날릴 때, 꽃눈이라며 혹은 연분홍 눈이라며 눈 맞듯 거닐었고, 밟아도 그리 멍들거나 물러지지 않았다. 땅 위에 조용히 내려 앉아 바람과 햇살에 제 몸을 말리며 고들고들한 마른 꽃잎 되어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그래서 더 진한 여운을 남긴다.
큰 꽃의 낙화가 멍든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아 쓸쓸하다. 우리는 큰 사람들이 행한 사회적인 공헌에 많이 기대며 산다. 기대치가 높았는데 실망을 주는 일이 생기면 허탈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 또 다른 큰 사람이 나타나기를 희망한다. 큰 사람들이 한 번쯤은 자신의 뒷모습을 소중히 생각해 보는 마음을 가져 보라고 저기 백목련 꽃은 해마다 그렇게 피었다 지는 것이리라.
작은 꽃 같은 사람들은 살아서 이름 한 번 내비추지 않고도 있는 듯 없는 듯 잘 살아낸다. 누구를 위해 살았노라고 목소리도 높이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의 인연 속에 스치며 살 뿐이다. 오로지 자신의 삶에 우직할 뿐이다. 그러다 언젠가 그들의 작은 일상도 소리 없이 흩날려 갈 것이다.
작은 꽃 같은 내 삶이 어찌 벚꽃의 낙화와 비길 수 있겠는가. 작은 삶이라도 그처럼 곱다고 말할 수 없다. 방긋 웃다가 사라지는 그 작은 몸짓을 난 더욱 사랑하리라. 봄날의 풋풋한 하루를 꽃과 더불어 생각해 본 날이다. 작은 꽃의 낙화가 내 마음 속 깊이 거대한 산처럼 곳곳하게 자리 잡아 주었다. 지금부터라도 더 밉지 않는 작은 꽃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 작은 꽃잎 흩날리며 사라지는 조용한 마지막을 위하여 내 진정 고운 꽃을 피우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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