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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고독한 사이프러스 / 민명자

 

고독한 사이프러스 / 민명자

 

 

 

바닷가 절벽 위에 한 사나이가 서 있다. 몇 발짝만 더 내디뎌도 곤두박질칠 것 같은 벼랑 끄트머리,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엔 해무 자욱하여 하늘과 바다의 경계 흐릿하고 파도는 구름처럼 하얗게 밀려서 오가며 물보라를 일으킨다. 해안에선 바다사자 몇 마리가 바닷물에 몸을 적시고, 크거나 작은 바위 위에 앉았던 바닷새들은 바람 사이를 가르며 가볍게 창공으로 몸을 날린다.

그 사나이가 사는 곳은 미국 몬테레이의 바닷가, 한때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다. 사람들은 그가 잘 살 수 있도록 울타리를 만들며 보호해 주었다. 덕분에 폭풍과 비바람을 꿋꿋이 견뎌냈다. 그 이름, ‘고독한 사이프러스(The Lone Cypress)’이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해안도로 17마일 드라이브 코스, 아들네와 우리 내외를 합해 여섯 식구가 긴 여행길을 나선 참이다. 왼쪽으로 산을 끼고 오른쪽으로 망망한 태평양의 바다가 펼쳐지는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절벽 끝에 홀로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고독한 사이프러스’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조망대로 갔다. 그의 나이 250여 살. 참으로 장하다. 옥토였다면 살아내기가 쉬웠으련만, 하필이면 돌무더기 틈에서 뿌리내리며 생명을 지켜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늘과 바다와 바람을 벗하며, 뜨거운 한낮엔 태양을 머리에 이고, 깜깜한 밤에는 별을 세면서, 오랜 시간 고독을 견디며 의연하게 서있는 나무. 고독한 사나이의 모습이다. 인생 역정을 헤쳐 나온 사나이, 벼랑 끝을 밟는 것 같은 세상살이에서도 꺾이지 않고 고된 풍파를 겪어낸 사나이의 형상을 사이프러스에서 본다.

한 사나이가 생각난다. 그는 이민 3세대이다. 낯선 땅에서 뿌리를 지키려 애쓰는 디아스포라의 삶, 저 사이프러스를 닮았다. 그의 조부는 하와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1세대 이민자였다. 이국땅에 홀씨처럼 흘러든 조부는 농막에서 거주하면서 노예처럼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숨통이 트인 건 ‘사진 신부’로 아내를 맞이하면서부터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사진으로만 본, 여덟 살 연하의 한국 처녀였다. 두 사람은 다행히 뜻이 맞아 희망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는 하와이를 떠나 온갖 궂은일 해가며 떠돌다가 겨우 터를 잡았다. 내가 아는 사나이는 그렇게 조부모와 부모가 모진 풍상 다 견뎌낸 세월을 뿌리 삼아 이곳 몬테레이에서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는 삶이 고달플 때면 저 사이프러스를 찾아와 위로를 받고 간다고 했다.

또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지체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애초부터 돌 틈에 뿌려진 씨앗이었던 게다. 거친 세상에서 잘 자랄 수 있도록 돌 더미를 가려줄 부모님마저 일찍 돌아가셨다. 천애 고아가 된 그는 스스로 자라야 하는 야생의 사이프러스였다. 그래도 용케 잘 견뎌냈다. 간신히 중학교를 마치고 혼자 살아야 하는 동안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런 중에도 다행히 좋은 여자를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마저 두 아이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 아이는 그의 가지에 깃을 친 두 마리의 새였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살아가는 힘이며 즐거움이었다. 많이 배우지 못하고 몸도 성치 못한 그는 하루하루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지만 늘 웃으며 산다. 아이들은 장애인 아버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한다. 시장 입구에서 간이포장마차를 하다가 그것마저 철거를 당한 후엔 농촌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는 흙을 만지며 사는 사람들을 울타리 삼아 살아간다. 너그럽지 못한 도시의 품과는 달리 농촌 인심은 아직 따듯하다. 농촌의 이웃들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일부러 그에게 맡기며 생계를 돕는다. 그를 큰 사이프러스 나무로 살 수 있게 하는 건 흙의 힘이다. 흙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힘이다.

내 곁에 한 사나이가 서 있다. 내가 쉬어갈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 내 남편이다. 그의 삶도 만만치는 않았다. 고단한 세월의 무늬로 나이테를 그리며 일흔 살의 사이프러스로 내 옆에 서있다. 그 곁에 또 한 사나이가 있다. 나의 아들, 마흔다섯 살의 사이프러스이다. 바람 부는 세상에서 굳건히 살아내 줘서 무척 고맙다. 아들 세대는 머지않아 이른 퇴직과 백세 노후라는 불확실한 야생의 미래와 맞서야 할 것이다. 이 시대 가장들이 딛고 서 있는 땅은 메마르고 안개 또한 자욱하다.

사나이 못지않은 치열함으로 가솔을 책임지는 여인네도, 우리의 N포 시대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인 젊은이도, 그 누구라도, ‘지금, 여기’에서 가파른 벼랑에 선 것 같은 삶을 이어가는 이 시대의 사이프러스들이 세파에 무릎 꿇지 않고 망망대해 같은 세상 당차게 굽어보며 창창하게 가지 뻗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저 하늘과 구름은 인간사 초연한 듯 유유자적하고, 파도는 철썩철썩 짓궂게 벼랑 언저리를 때리다가 허전한 포말만 남기고 달아난다.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고 긴 세월 살아온 남편의 손을 가만히 잡아본다. 중년의 가장으로 서 있는 아들을 마음속으로 힘껏 안아본다. 저기서 ‘고독한 사이프러스’가 바람에 잎을 흔들며 빙긋이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