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아름다운 손 / 이혜주

아름다운 손 / 이혜주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이 상쾌하다. 동창이 희붐해 지면서 창밖의 풍경이 유혹한다. 안개에 휘감긴 산허리는 비단 띠를 두른 여인의 자태와 같이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이렇게 안개가 짙게 드리운 날은 혼자서 산책을 해도 외롭지 않으리라. 곤히 잠든 남편을 뒤로하고 살그머니 현관문을 나선다. 심호흡을 해본다.

상쾌한 공기가 가슴 깊이 스며든다.

안개 속에 잠긴 호수는 말없이 모든 것을 품고 있다. 작은 일에도 자제력이 부족하고 감정 노출이 심한 내 모습이 대비되어 떠오른다. 한 무리의 청둥오리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날고 있다. 얼마를 걸었을까 햇살이 비치더니 아침 안개를 슬금슬금 걷어간다. 햇빛은 일순간에 주위의 풍광을 바꾸어 놓는다. 조금 전까지도 물안개 속에 잠겨 있던 호수를 금빛 물결로, 풀숲의 모든 것을 투명하고 눈부시게 만든다. 갈 숲 사이로 바람이 불어 가로수의 낙엽을 떨어뜨리며 느린 걸음으로 가던 가을을 재촉하는 듯했다. 갈잎 구르는 소리와 은빛 갈대가 서로 호흡을 맞추며 이중주를 연주한다. 화음이라도 이루려는 듯 어디선가 진한 커피 향과 낙엽 타는 냄새가 난다. 저만큼에서 미화부 아저씨가 잠시 일손을 멈추고 쉬고 있다. 깊게 파인 주름이 그물처럼 드리워진 얼굴에서 그의 고단한 삶을 말해 주는 듯하다. 낙엽을 태우며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아저씨의 표정이 무척 평화롭다.

새벽일 나가는 남편을 위해 아내가 정성과 사랑을 담아 준비했을 것이다. 아마도 아저씨는 커피보다 더 뜨거운 아내의 사랑을 느끼면서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했으리라. 낙엽을 긁어모으는 손이 갈퀴보다 더 마디가 굵고 거칠다. 긴 세월 가족을 위해서 일한 손이다.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 밝은 인사를 남긴다.

간밤에 잠을 설친 남편이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다. 남편의 손을 살며시 잡아 보았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다. 그렇게도 두텁고 강했던 손이 지금은 나약한 손이 되어 힘없이 가슴에 얹혀있다. 이 손이 결혼식 날 젊음과 활기와 패기가 넘쳤고 일생동안 사랑하기로 서약한 손이 아니던가, 아플 때 위로해 주었으며 위아래로 가족을 부양하고 새 삶을 개척해 나가느라 깎이고 지친 손이다. 남매로 곱게만 자라온 나는 철이 없었다. 구 남매의 맏며느리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지도 몰랐고 그에 따른 책임감도 인식하지 못했다. 많은 형제들이 부러웠으며 재미있어 보였다. 프리마돈나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내 인생 항로의 키를 그 사람의 손에 맡겼다. 결혼 후의 현실은 달랐다. 내가 꿈꾸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따뜻한 항구가 아니라 비바람이 몰아치는 폭풍의 언덕이었다.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소속감과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살얼음을 딛는 듯 조심스러움과 맏며느리의 책임만 요구되는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다. 많은식구들의 식사와 빨래, 매일같이 찾아오는 손님, 제사는 한 달이 멀다 하고 이어졌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쳐만 갔다.

대 가족 속에 적응하지 못한 결혼 생활의 두려움이 불안과 분노로 변해 남편을 비난했다. 당신은 나의 꿈과 아름다웠던 인생을 빼앗아간 사람이라며 울부짖었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좌절할 때 남편의 손은 슬픔의 눈물을 닦아 주었고 두 손을 잡아 이끌어 주었다. 새 생명이 태어난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 내 얼굴을 만져준 크고 맵시 없게만 보였던 그 손이 얼마나 부드러운지를 그때는 몰랐다. 이 손이 바로 포근한 사랑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하나하나 보듬어 가르치고 힘들 때 용기를 북돋우고 고통을 덜어 주었다. 오랜 세월 동안 가족을 위해 열정적인 삶으로 헌신한 손이다. 장마와 폭염과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언제나 그 자리에 의연하게 서 있는 큰 나무처럼~~

지난 세월 뒤돌아본다. 때론 슬픔과 아픔도 있었지만 믿음과 사랑으로 묵묵히 지켜주는 남편이 있어 삶이 아름다웠고 행복했다. 간에 이상이 있었다. 절 재를 위해 수술실로 들어가기 직전 내 손을 꼭 잡고 입술을 굳게 다문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하느님 살아서 이 사람의 얼굴을 보게 해 주세요 그 때는 내 손이 남편의 눈물을 닦게 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와 함께 깊은 잠 속으로 빠저 들어갔다. 아픔이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듯했다.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삶이 날 떠나고 있었다. 생애의 마지막 신비인 죽음을 향해 떠나고 있었다. 두렵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뿐 이라면! 하지만 깨달았다.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희미한 속삭임이 들린다. 한 줄기 빛이 보였다. 엄마를 부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실눈 사이로 들어왔다. 안도의 눈빛으로 내 얼굴을 만지고 있는 남편의 모습도 보였다. 낯선 여행길에서의 행복한 만남이였다. 긴 시간의 대수술,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나는 생을 택했다.

우리는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더욱 소중하다. 남편의 눈물이 내 뺨 위로 떨어졌다. 정성껏 눈물을 닦아주는 그 손이 참으로 포근하고 따뜻했다. 나무의 나이테는 겨울에 더욱 강해진다. 씨 뿌려 가꾸어 추수를 마치고 겨울의 계절에 접어든 이 손이 강한 의지와 믿음의 나이테가 되어 남은 날에도 우리 가족들의 삶을 행복으로 가꿔주고 지켜 주리라. 갈퀴 같던 미화부 아저씨의 손도, 주름지고 초라해진 남편의 손도, 세상의 어떤 손보다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