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 김복건
남자가 보인다. 가장의 하루가 희석되고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옅은 점과 잔주름이 그저 수수하게 나이 든 모습이다. 조금 더 가까이 보니 흰 머리카락이 솔잎 마냥 이곳저곳에서 삐쭉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빗질을 해 보지만 은빛 솔잎은 오랜 세월을 버틴 대나무 마냥 고개 숙일 줄 모른다. 거울에 비친 자화상이다..
아! 벌써 이렇게 되었나?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늘 겉만 보였던 거울 속에 또 다른 무엇이 있음을 느낀다. 거울은 빛의 반사를 이용하여 물체의 형상을 보여주는 물건이다. 평면 유리 한쪽에다 수은을 발랐지만 모든 것을 그대로 비춰주고 있다. 안에는 본래 아무것도 없다. 텅 비어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다 채울 수 있다. 손을 비추면 손이 보이고, 사람이 거꾸로 서면 그도 나를 따라 거꾸로 서서 버틴다. 내가 한가로이 저녁을 먹고 있으면 그도 평화로운 만찬을 즐기고 있다.
거울은 물체가 사라지면 비침 현상 또한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길가의 꽃은 지나가는 이들을 즐겁게 해 주지만 그는 꽃을 피우고 향기를 내뿜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향기나 내면은 그도 어쩔 수 없나 보다.. 꽃이 거울에서 사라졌다 하여 그 꽃이 없어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두께 1cm1cm 정도밖에 안 되는 그곳에 저 깊은 바다를 다 담고, 저 넓은 자연을 다 품고 있다. 그는 참으로 넓은 마음을 가졌나 보다..
코흘리개 친구들이 떠오른다. 배고프던 그 시절의 우리는 골목에서 어울려 놀았다. 자치기, 벽치기, 구슬치기, 술래잡기 등 여러 놀이로 어울렸다
. 해가지고 어둑어둑할 때 누나가 저녁 먹으라며 큰소리로 귀가를 알리면 모두 아쉬워하며 헤어졌다.
그때는 지금처럼 컴퓨터나 게임기 등 특별한 놀잇감이 없었기에 골목길에서 또래들이 어울려 뛰놀기 일쑤였다. 그중에서도 낮에는 손거울로 멀리 있는 담벼락과 친구들의 얼굴을 향하여 반사된 빛을 미사일을 쏘듯 재빨리 손목을 움직이며 놀던 기억도 있다. 한 친구가 손거울로 멀리 미사일을 발사하면 우리들은 재빨리 따라갔다. 그때 촌스런 이름을 가진 예쁜 옆집 꼬마 숙녀도 있었다. 여고 시절 법원 판결로 이름을 바꿨지만 그 아이에게도 빛이 전달되면 사랑을 눈치채고 받아 주기라도 하듯 윙크로 깜빡여 주었다.
거울! 거울은 비춰주는 것이다. 마치 요술쟁이만 같다. 눈앞에서 각도만 맞추면 멀리 있는 물체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너무 멀리 있는 사물이나 골목길에서 뛰놀던 아련한 추억은 보여주지 않는다. 미국으로 이사가 살고 있는 오랜 친구도, 첫사랑 꼬마 숙녀도 거울로 보고 싶다. 각도를 돌려 볼 수만 있다면 ‧ ‧ ‧
이몽룡은 성춘향과 이별할 때 “대장부의 평생 마음 빛과 같은지라 몇 해가 지나도록 변하지 아니할 것이니, 깊이 간직하고 내가 보고 싶을 때 나를 본 듯이 열어보라” 말하고 명경을 줬다 한다.
도련님이 보고 싶어 하루에도 수없이 명경을 보고 안녕과 과거급제를 기원하던 춘향의 시선은 볼 수만 있다면 한양 이곳, 저곳을 각도를 맞춰가며 도련님을 찾았을 것이다. 희미해져 가는 명경에 먼지라도 앉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닦고 또 닦았을 춘향의 사랑이 머리가 희끗해져 가는 나와 같이 안쓰럽다.
사람들은 꿈속에서 거울이 깨지면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을 하곤 한다. 이와 같이 하루에도 몇 번씩 접하는 거울은 우리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울은 내가 노래를 불러도 같이 화음을 맞춰주지 않고, 화를 내어도 화를 보여주지 않으며 그저 시늉만 낼뿐 마음을 나누지 않는다. 그래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는 즐겁거나 슬프다고 눈에 띄게 흥분하지도 않고 소리쳐 울지도 않는다. 언제나 냉철함을 유지하고 현대를 살아가기에 그런 장점을 배우려 노력한다.
나는 하루에 한두 번쯤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보았다. 그저 남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이물질이나 묻지 않았는지 혹은 넥타이는 바로 매어졌는지 그리고 거울에 비춰진 얼굴의 표정은 밝은지 정도로 보았다. 그때는 선정(禪定)의 심성(心性)으로 그를 바라보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그에게 다가갈 수 있다.
고요한 물에는 사물이 비치지만 성난 파도 속에는 사물이 비치지 않을 것이다. 비침 일지라도 볼 수 있으면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느끼면 행할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어리석다면 거울에 반사되는 사물만 바라볼 것이고, 현명하다면 그 속의 진상(眞像)을 보리라 생각되기에 나는 그가 다치지 않도록 호~호 불면서 온몸을 어루만지며 닦고 또 닦는다.
남은 생을 함께할 거울 속 신사에게 말한다. 그대 ! 오늘도 행복하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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