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심재 / 손수여
아들의 부름이 있었다. 한 달 전쯤 미리 알려줬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세상이 시끄러운데 가지 않으려고 했다. 제 집에 오란 것도 아니고 직장 상사였던 선생님 댁 방문이라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꼭 오셔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다. 아버지 시집의 애독자이므로 한번 뵙고 싶어 한다는 이유를 댔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핑계를 붙이며 포항 근교에 있는 그 집의 마루에 들어앉은 때는 해가 중천에서 기울어진 시간이었다. 멀리 높지 않는 안산이 한 일자로 곧게 그어진 듯 뻗어 있고, 가까이 오른쪽으론 솟아오른 봉우리가 문필봉을 상징하듯 했다. 자연의 가치와 조화로운 이 전원주택에서 우아미가 느껴졌다. 뒤로는 야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한가한 논밭이 내려다보이는 이 가옥은 가히 명당의 자태를 갖추고 있었다.
지붕이 그리 높지 않은 시골 한옥, 정남향 일자형이고 약간 층이진 아래윗집의 두 채였다. 윗집은 선생님 부부의 주거용인 듯하고, 아랫집은 서재 겸 접빈실 기능도 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위쪽을 쳐다보다 흘림체로 쓴 현판의 ‘항심재(恒心齋)’에 눈길이 멈췄다. 여기가 항심(恒心)을 수양하는 곳인가 싶어 문득 심신이 긴장되었다. 앞마당의 정원이나 거실과 주방 사이 공간에 화초를 가꾸어 항심재의 품격을 유지시켰다. 기품 있고 올곧게 자란 난들은 변함없고 흐트러짐 없는 항심(恒心)과 무관하지 않았다.
자리는 차츰 근사하게 전개되었다. 아모고등학교 교감 선생님이란 정보만 갖고 왔었는데 통성명 이후에는 최근 교장으로 승진된 기쁜 소식을 들었으니 말이다. 잘 왔구나 생각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며 아들 내외는 술과 생선회, 산채 취나물과 가지나물, 찰밥과 갈비탕, 천혜향과 곶감 호도 말이, 강정 등을 차렸다. 상이 이뤄졌으니 무슨 개폐라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아들이 운을 뗀다. ‘교장선생님 승진 축하’ 이 첫 마디에다 귀를 집중하고 있는데 이 자리는 <시인 수여와의 대화>라며 포문을 여는 것이다. 송구하고 미안하였지만 자식이 해 준다는 명분이 있으니 내게는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덕과 인품의 대명사로 여기는 교장선생님이 나의 시에 대한 애독자라는 사실에 과분하기도 했지만 내심 고마웠다. 『반추』 등의 졸시를 읽고 낭송도 선보였다. 가져간 시집 『숨결, 그 자취를 찾아서』 , 『한국문화선양』 창간호와, 발문을 쓴 이영식 시집 『어해도 가는 길』을 건넸다. 앞쪽 속지에다 “이관희 교장 선생님 혜존/ 승전을 감축하며/ 손수여 올림”이라 적고 마음으로 봉정했다.
열세 해 전 아들이 군복무 후 포항고에 복직했을 때 교무부장이셨던 이관희 선생님은 직장 초년생인 아들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신 분이었다. 아비로서, 첫 발령을 받았을 때 아들에게 당부했던 일성(一聲)은 “아이들에게 창의적인 교육을 하라”고만 했다. 이것을 아들은 포고에서 실험적으로 시행한 “교사와 학생이 함께 커가는 토론식 수업, 수능 후 집중식 시 쓰기 교육”이 결실을 맺어 고교 3학년들의 꿈 많은 삶을 그려낸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자리』를 엮어 졸업 선물로 주었다. 그것은 포항고와 포항여고를 거치는 동안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 되어 경북과학고에서는 도서출판 창작과비평에서 전국 공모한 실험수업 『담쟁이 교실』이 발간되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며 힘들어 할 때 선생님께서 한결같은 칭찬과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고 그제야 귀띔을 했었다. 일회성이나 한시적이 아닌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항심, 항심으로 살아온 교장선생님의 철학이 아들에게 영향을 주셨다. 현판에 쓰인 저 항심재와의 오늘 인연은 결코 우연이 아닌, 오래 전부터 이곳으로 예견되어 있었음을 무언으로 전해 듣고 있었다.
이관희 교장선생님의 항심의 화초에 거름을 주고 물을 주며 평생을 뒷바라지해 온 사모님의 내조를 지나칠 수 없었다. 과묵함과 특유의 온유함에서 사모님의 그간의 이력이 묻어났다. 남편의 기운은 아내로부터 나오는 이 보통의 이치를 사모님은 실천하셨던 것이다.
내가 아들의 첫 발령 때 던진 ‘창의적 교육을 하라’는 일성이 항심재에서 울울창창 가꾼 교장선생님의 항심을 만난 아들에게 언제나 평상심에서 항심으로 간직해 주기를 바라는 이 간절함이 나의 진정한 항심이 아닐까 싶다. 항심재 변함없는 마음을 낮술에 담아 거푸거푸 건배를 든다. 아들의 가슴에 허연 낮달이 소금으로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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