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매 / 이길영
청매가 살포시 눈을 떴다. 회색의 겨울 정원에서 세상사 무에 그리 궁금한지 이르게도 일어났다. 다른 나무들은 살아있는 티도 내지 않고 웅크린 채 겨울을 나고 있는데 말이다. 눈을 배시시 뜨고 이리저리 살피는 청매와 내 눈이 마주쳤다. 새 달력을 겨우 한 장 걷어낸 이월 초순인데 참 성미도 급하다. 춘삼월 중하순이 저희의 꽃자리임을 잊었는가 보다.
수술을 앞두고 짐을 챙겨 집을 나서는데 삭막한 겨울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 정면에 하얀 꽃망울을 조롱조롱 매달고 있는 청매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 발걸음을 옮겨 녀석에게 다가갔다. 꽃 눈망울을 보는 내 눈길에 녀석은 “올겨울은 유난히 따뜻해서 일찍 나왔어요.”라며 웃는 듯 답했다. “내일이 가장 춥다. 맹추위 잘 이겨내야 한다.”라며 청매에 눈을 맞추었다.
따뜻한 겨울날을 믿고, 정월에 몽글몽글 꽃망울을 키우고 있을 때부터 나는 내심 불안했다. 어쩌자고 제일 추운 정월에 몸을 열려고 하는지. 아직도 혹한은 몇 번이나 더 칠 터인데. 애처로운 마음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다행히 주위의 키 큰 나무들이 어깨동무하고 있어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철없는 청매의 바람막이가 되어주라고 큰 나무들에 부탁하고 대문을 나섰다.
지난해 건강검진 때였다. 유방암 검진 중 갑상선 초음파까지 하겠냐고 물어왔다. 수십 년 건강검진을 했지만 갑상선 검사는 해본 적이 없었다. 한 번은 해봐야 할 것 같아 그러자고 했다. 초음파를 하니 갑상선 양쪽에 혹이 제법 크고 모양이 좋지 않다며 세침검사를 권해왔다. 그러자고 또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부분마취를 한다 했다. 침을 삼키면 절대 안 된다며 겁을 주었다. 마취 하는데도 통증이 극에 달했다. 침을 삼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 통증까지 더해지니 감당할 길이 없었다. 당일은 목이 마비 수준이었고. 그 후 일주일 동안 목감기처럼 목이 아팠다. 일주일 후 암 같다고 재검사 하자는 전화가 왔다.
세침검사 시 통증이 너무 심해 재검사가 무서웠다. 또 그즈음 갑상선 수술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한다고 전파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갑상선암은 암도 아니라는 등의 이야기들이 나를 미적거리게 했다. 여럿 모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나더러 참 웃긴단다. 빨리 검사하러 가지 않고 남의 이야기같이 하고 있다고 나무랐다.
연말모임에서 내과 전문의 P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께 갑상선도 보시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기에 며칠 후 P선생님의 병원을 찾았다. 자초지종을 듣고 초음파 진료를 하시더니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크기도 제법이지만, 위치가 성대와 붙어있으니 삼성서울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서둘러 예약하라며 몇 가지 당부 사항을 안내하고는 수술을 위해 맞는 영양 링거를 맞고 가라 했다. 종양이 성대 근처에 붙어있어 더 위험하다 했다. 순간 “제가 살려고 선생님을 만났나 봅니다.”라며 손을 잡았다.
주사실로 가는 내 마음은 처연한데, 마음과는 달리 눈에서는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뜨거운 것이 줄줄 쏟아졌다. 주위 사람들을 보기 민망할 정도로 눈물은 멈추어 주지 않았다.
남편과 서울역에 도착하니 아들과 사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삼성서울병원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6인실이 없어 2인실 입실이라고 미리 안내받은 대로 입원했다. 서울에 사는 아이들이 퇴근하여 모두 모였다. 아들은 어미를 위해 휴가를 냈다며 병실에 있겠다고 했다. 딸 내외가 남편에게 자기네 집으로 함께 가길 권했다. 십 년 만에 아들과 둘이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아들은 대학을 다니면서부터 서울 생활이었다. 아들은 내 손을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병원의 첫 밤을 건넜다.
다음날 새벽에 링거를 꽂고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침 일찍 찾아온 남편과 아이들을 뒤로하고 수술 대기실로 옮겨졌다. 오한과 두려움으로 내가 아이들에게 잡힌 새 모양 같았다. 수술 대기자가 참으로 많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걱정이 더 빨리 달려왔다. 수술은 잘 되겠지, 마취가 안 되는 사람도 있다는데, 수술을 처음 겪는 나에게 두려움이 와락 안겨 왔다. 수술실로 옮겨지고 서늘함이 또 달려들었다. 다리를 묶더니 “전신 마취합니다.”하며 마취 의사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웅성웅성하는 소리 들리더니 “여기 회복실입니다.”했다. 회복실에서 산소마스크는 끼고 있는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울렁거림으로 숨을 쉴 수 없다는 표시를 하니까 링거 약으로 처지를 하는 듯했다. 그리고 병실로 옮겨졌다. 침대에 누인 나를 밀고 가는데 어지러움과 오심 등으로 눈조차 뜰 수가 없었다. 가족과 모여든 친지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는 들렸다.
저녁에 담당 주치의가 왔다. 손발이 저리고 몸의 통증을 호소하니까 “손발 저릴 리가 없는데요. 부교감신경 살렸고 성대도 살렸으니 괜찮을 겁니다.” 했다. 그 말은 큰 상을 받은 듯 안심을 안겨줬다. 병원에서의 둘째 밤은 딸이 병간호를 하겠다고 나섰다. 남편을 사위와 보내고 딸아이와 밤을 건너기로 했다.
소변 량 체크도 해야 하고, 내 움직임에 눈길을 주며 딸아이가 잠을 못 자고 애를 썼다. 기력이 없었지만, 별생각 없이 화장실에 가다가 죽는 줄 알았다. 몸을 가눌 수가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마침 간호사가 보더니 깜짝 놀라서는 “환자분 전신마취 수술한 몸입니다!”라고 소리치며 도와주었다. 전신마취가 그렇게 몸을 힘들게 하는 줄 몰랐다.
길게 자른 목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 피 주머니를 채우고 있고, 침을 삼킬 수가 없었다. 그보다 우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시키는 대로 숨을 크게 들어 마시고 내쉼을 하는 것도 힘들고 빨리 회복되지 않았다. 물도 못 마시게 하지만 목이 아파 마실 수도 없었다. 목에서 빼내는 피 주머니 속에 공포감도 자리하고 있었다. 물 한 번 시원하게 먹어보고 싶었다. 기침도 하지 말고 참으라 했다. 기침이 평소보다 적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소변과 심호흡으로 전신마취 가스를 빼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통증의 밤을 지나고 나니 눈이 좀 뜨이고 살 것 같았다.
눈보라의 혹한도 건너고 집으로 돌아온 날은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아픔을 견뎌내고 살아 돌아온 감동 때문이 아닐까. 일상의 삶에 감사하지 못했던 지난날이었다는 생각이 스친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바람막이가 되어준 가족애도 몸으로 느낀 날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세상이 다 바람막이로 보였다. 사는 게 이런 것이다. 잘 사는 것이, 가족이란 바람막이를 만들어 좋은 풍경 찾아 온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다.
정원으로 나가본다. 청매는 혹한을 이기고 돌아온 나처럼 겨울바람을 잘 견디고 있다. 주위의 나무들과 어울려 가며 꽃망울을 피우고 있다. 몸을 활짝 열고 내게 웃어주는 녀석이 참으로 고맙기만 하다. 병실에서 나를 지켜준 내 가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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