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고양이 / 안연미
진정한 타협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텃밭을 가꾸고 가족의 쉼터가 된 시골집 마당은 이제 녀석의 쉼터이기도 하다.
지난해 여름 휴일 낮이었다. 텔레비전에서 흥미로운 프로가 시선을 끌었다. 어느 농가에 작물을 망치는 짐승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프로그램 제작팀이 출동했다. 넓은 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범인은 두더지였다. 결국, 고양이 몇 마리를 풀어놓은 것으로 소동은 말끔히 해결되었다.
시골집에도 두더지 피해를 당한 때가 있었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마당을 이랑 일구듯 울퉁불퉁 망쳐놓았었다. 굵은 모래와 흙을 섞어 편편하게 해놓아도 사람이 살지 않으니 헛일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두더지 피해가 없어져서 의아했었다.
차를 세우고 마당에 들어섰는데 새카만 고양이가 등을 잔뜩 휘고는 노려보고 있었다. 흰털 고양이는 어쩌다 동네 어귀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검은 고양이는 동네에서 처음 보는 녀석이었다. 짐승이 사람을 보면 냅다 도망을 가는 것이 우선이거늘, 녀석은 꼼짝 않고 제집인 양 버티고 있었다.
녀석의 검은 털은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반들거렸다. 남편의 쫓는 시늉에도 도망가는 척하다가는 다시 돌아왔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두더지 소행이 없어진 것이 혹시 저 녀석 덕분은 아닐까. 그렇다면 도망가지도 않는 녀석을 굳이 쫓아낼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텃밭에서 잡초를 뽑고 흙을 다지는 동안, 녀석은 한동안 마당을 어슬렁거렸다. 일하다가 다시 마당을 내려다보니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갔나 보다 하고 돌아서면 나무 뒤에서 ‘야옹’하고 나타나기를 거듭했다. 내가 녀석의 위치를 살피는 동안, 녀석도 나를 관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녀석과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쳤다. 아까와는 달리 제법 눈빛이 부드러워 보였다. “야옹아, 밥 줄까?” 했더니 말귀를 알아들은 것처럼 옹옹 거리며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안보는 척하면서 녀석을 살펴보았다. 발등은 갓난아기가 끼고 있는 손 장갑처럼 희고, 목덜미에도 흰 띠를 두른 털이 깨끗했다. 나를 보고 있는 녀석의 동그랗고 노란 눈이 제법 예뻤다.
어둠이 엉성한 매실 가지 사이를 덮을 무렵, 멸치 한 줌으로 녀석을 유인했다. 코를 실룩대는 것만 봐도 녀석은 벌써 냄새를 맡은 것이 분명했다. 동그란 눈에서는 광채가 났다. 돌 위에 먹이를 올려놓았지만, 경계하던 녀석한테는 우리가 방해꾼인 것 같았다. 자리를 비켜줄 겸 차를 타고 팔조령 터널을 빠져나왔다.
담장 없는 집이다 보니 녀석은 마당을 거쳐 현관 가까이에 쉽게 들어왔다. 지난번보다 더 많은 양의 멸치를 내주었더니 경계도 하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다 먹을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막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녀석은 갑자기 내 옆을 스쳐서 닫힌 현관문에 일자로 매달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더니. 앙칼진 소리를 내면서 집요하게 문을 긁어댔다. 검고 기다란 등을 보고 있자니 소름이 끼쳤다. 나의 기대를 깨버린 녀석을 더는 거두고 싶지 않았다. 새끼 찾는 어미처럼 이리저리 문 앞에서 거세게 울부짖는 녀석을 뒤로하고 부랴부랴 그곳을 빠져나왔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녀석의 상황이 궁금해지는 것은 또 무슨 조화일까. 그날 밤, 아무런 타협도 없이 내빼듯 빠져나온 탓인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가당찮았을지도 모른다. 남의 음식을 몰래 훔쳐 먹은 것도 아니요, 본능대로 먹이가 있는 곳으로 돌진했을 뿐이었다.
고양이는 영특한 짐승이다. 주인에게 복종하는 개와는 달리, 인간과 타협의 성향을 가진 우월하고도 도도한 종족이다. 녀석의 본능을 탓한 나의 가치 기준도 형편없었지만, 두더지 횡포를 막아주는 역할에만 녀석의 존재감을 두었던 불순한 의도가 양심을 찌른다. 어쩌면 이것으로 녀석과의 신뢰감은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
나와 녀석 간에는 저대로의 지향점이 달랐다. 목적은 서로 다르지만, 묵언의 타협은 필요했다. 두더지를 처치해주는 값으로 내어준 멸치 양만으로는 타협점이 될 수 없었는지 달포를 지나는 동안 녀석은 많은 먹이를 내게서 가져갔다.
오늘도 녀석이 마당을 어슬렁거린다. 긴 햇살이 녀석의 등을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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