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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바람달 / 김민숙

바람달 / 김민숙

 

 

현관을 나서려다 스마트폰으로 날씨를 확인한다. 강설에 강풍이다. 방으로 되돌아가 옷장을 뒤적인다. 세탁소로 간 오리털 파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막이 점퍼를 겹쳐 걸치고 목도리를 둘둘 감는다. 며칠간 볼을 스치는 바람이 훈훈하길래 겨울옷을 정리한 것이 성급했나 보다. 서둘러 겨울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였을 게다. 해마다 이때만 되면 되풀이하는 실수다.

절에 가는 길이다. 집을 나서니 매섭게 몰아치는 눈바람이 등을 민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걸어가려던 마음을 바꿔 버스 정류장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앞서가던 젊은 남자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뒤를 휙 돌아보더니 황급히 일어나 정류장 쪽으로 종종걸음을 친다. 다치지 않아 보여서 다행이다. 내가 넘어졌다면 나이도 있는데 온전했을까 싶어 정신이 번쩍 든다. 무엇을 이루겠다고 나는 이 눈길을 나섰는가. 돌아서야 하나 잠깐 망설인다. 걸을 작정으로 등산화까지 챙겨 신고 나왔는데 돌아간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날씨 탓을 하려 든다면 년 중 절반은 집에 주저앉아야 할 일이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지구 온난화가 맹추위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극지방의 기온이 오르면서 형성된 소용돌이 기류가, 에어커튼 역할을 하는 제트기류를 뚫고 한반도를 포함한 중위도 지역으로 찬바람을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따뜻해서 되레 춥다는 이 복잡한 바람길이 도무지 머리에 그려지지 않는다. 어쨌든 서울이 시베리아보다 더 추웠다는 겨울도 계절의 시계를 멈추지는 못했다. 오늘은 농부가 흙을 일구고 씨 뿌릴 준비를 한다는 춘분이다.

올해도 한 해의 농사를 계획한다. 농사라고 하지만 밥벌이하는 일도 아니고 거둬들일 알곡이 있는 것도 아니다. 평소에 접하지 않던 경전을 읽고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기로 했다. 혼자 가는 길보다 함께 가면 좀 더 오래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지난해부터 도반 십여 명이 모여 시작한 일이다. 때론 우리 절에서 출판되는 교재용 경전의 퇴고도 돕는다. 참여한 이들이 대부분 지긋한 연배이어서 이 모임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도 모른다. 이미 눈도 침침해서 글을 쓰거나 읽는 일도 오래 하지 못한다. 이 농사도 이미 파장인 셈이다. 그래서 올봄은 마음이 더 바쁘다.

바람을 피해 버스에 올랐더니 버스 안은 또 다른 바람이다. 버스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뉴스에 미투 바람이 휘몰아친다. 승객들은 뉴스에 귀를 기울이거나 스마트폰으로 새로운 소문을 검색하느라 바깥세상의 눈바람쯤은 안중에 없다. 뉴스도, 소문도, 인심도 세상은 온통 회오리다. 바람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다. 핵바람. 평화바람. 정치바람. 칼바람. 이제 미투 바람까지 불어 세상인심을 갈가리 찢는다. 사람들이 서로 할퀴고 물어뜯으며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린다. 바람 피할 곳이 없다.

차창 밖으로 눈을 돌린다. 눈은 지상에 닿자마자 녹아 차도는 질척이고 달리는 차들은 사정없이 진창을 뱉는다. 가로수들은 눈을 털어내느라 된바람에 몸을 뒤척이고, 잔가지들은 눈바람을 버티느라 소리 내어 운다. 잔뜩 웅크리고 눈길을 걷는 사람들은 앞사람이 남긴 발자국을 짓이기며 저마다 제 길을 낸다.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눈 덮인 들판을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시던 서산대사의 시를 속으로 읊조린다. 눈이 내리면 사람들의 마음도 덩달아 순해지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도심에서 세상의 허물을 덮어줄 눈은 꿈조차 꿀 수 없다. 도로를 달리는 차나 인도를 걷는 사람이 ‘가던 길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가는 것’이 오직 눈 내리는 날의 소망이 된 오늘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눈바람이 시야를 확 덮친다. 오싹 한기가 든다. 제아무리 큰 눈이 내리고 바람이 거세어도 오늘부터는 밝음이 한 뼘씩 더 길어지는 춘분이다. 미세먼지 품은 황사바람보다는 세상을 정화하는 눈바람이 낫지. 마스크를 내려 숨을 들이켠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청명한 기운이 의외로 상쾌하다. ‘일체유심조’라고 하셨느니. 부처님 말씀을 떠올리며 픽, 혼자 웃는다.

사방이 바람의 통로다. 오늘 같은 날, 가로수 앙상한 가지마다 오색 룽다 매달아 걸면 촉촉이 젖은 부처님의 사랑과 자비가 도시 구석구석 퍼져 나가기 좋겠다. 고개를 젖혀 나무를 올려다보니 겨우내 목말랐던 가지마다 움 틔우느라 우는 울음이 벅차다. 나무둥치에 손을 짚는다. 올여름은 풍성한 진초록 세상 열어 싱그러운 어깻바람 일겠다. 영등할머니가 장한 며느리를 앞세워 내려오느라고 바람에 눈까지 가세한 요란한 춘분이다. 바람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