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천천히 / 윤 영
J가 피렌체로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영희와 옥이와 대낮부터 집 앞에서 광어와 우럭을 시켜놓고 낮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두문불출하고 있는 나를 위해 고향 친구들이 찾아왔다. 셋은 모이면 흔해빠진 자식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같이 보내온 시절 이야기면 족했다. 방귀를 끼어도 흉이 되지 않아 좋다. 눈곱이 붙어도 괜찮다. 대성통곡을 하든 박장대소를 하든 허물이 되지 않으니 그저 그만이다.
J는 아치형 갈색 창문이 있는 단테의 집에 있노라고 했다.
우린 횟집에서의 끝나지 않은 수다를 데리고 집 뒤편 숲으로 들었다.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개미가 기어오르고 어린 은사시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뒤집힌다. 저수지 물결이 찰랑대고 새가 울다 간다. 뒷산에서 솔방울 따고 사금파리에 소꿉 놀던, 여름방학 숙제로 잔디 씨앗 받으랴, 퇴비하랴 힘들었지만 그립다고 입을 모았다. 읍내 사진관에서 사진기를 빌려 칠보산으로 떠났던 그때의 동무들을 모아 거국적으로 놀아보자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아슴아슴하다.
“자슥아 망 좀 봐.”옥이와 내가 내뿜는 오줌 줄기에 풀이 세차게 흔들린다. 쉰이지만 총각인 영희는 아직 혼자 산다. 그런 그가 씩 웃으며“가시나들 어여 일 봐”라며 돌아선다.
J는 빛바랜 벽화들과 붉은 지붕이 다닥다닥 붙은 토스카나 중세 마을로 간다고 했다.
옥이는 졸리는지 하품을 하고, 영희는 머리카락에 묻은 송홧가루를 털어낸다. 아픔은 뭉텅이로 찾아오나 보다. 두어 달 전 아끼던 후배가 남편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친구의 신랑이 동창회에 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보리밭에서 도시락 까먹던 고향 친구는 먼 나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깻죽지가 아프고 밥맛이 없다며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오빠에게 말기 암이라는 진단을 던졌다. 산다는 일은 상처투성이다.
J는 산지미냐노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에서 이국의 청년들과 커피를 마시는 중이라고 했다.
살아내기와 살아남기의 무게를 잴 수 있다면 둘의 무게는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까. 정작 고통받는 것은 그네들이지만, 내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목젖이 아팠다. 아무리 살고 죽는 일이 한 끗 차이라고 하지만 한 끗의 두께는 가늠되지 않는다. 산다는 것이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 자리에, 한 조각 구입하여 끼워 넣을 수 있다면 ‘슬픔’이나‘허망함’이나‘무기력’은 우주의 말이 되지 않았을까.
쉰셋 살의 오빠가 식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지 달포가 지났다. 오빠의 병상에서 팔순 노모는 굽은 허리 펼 새도 없이 고꾸라져 잠들다 사나흘씩 시골로 내려가신다.
“너 오래비 없이 나는 한순간도 살 수가 없다야. 오늘도 집안에만 있으니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밀밭골에 와서 도라지 심고 하릴없이 호미로 땅이나 파고 앉았구먼. 만장같이 이 넓은 세상에 하필이면… 저승사자가 너거 오래비 데려가면 용서 안 할끼다.”
엄마는 요즘 물먹은 솜뭉치로 가슴을 치고 있다. 진저리 칠 만큼 세상을 증오하다가, 새벽녘이면 기도를 하고, 대낮이면 밭고랑에서 울다가, 해가 빠지면 집으로 돌아간다. 하루에도 몇 번씩 관절에까지 물이 들어차고서야 수렁에서 나왔다. 지극히 평범했던 생활이 샛길로 빠져나간다. 그렇게 당신이 꽁꽁 걸어 잠근 가슴엔 좀체 햇빛이 들지 않는다.
J는 올리브 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가 싱그럽게 이어지고 포도나무밭이 펼쳐진 길을 걷는다.
우린 지하 노래방에서 세상의 종말이 오늘 끝장인 듯 발악을 하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을까. 있다면 그곳에선 몇 끼의 밥을 먹을까. 새우잠에 콧노래를 부를 때면, 문밖에서 동박새가 고개 까딱이며 울어줄까. 물도랑에는 푸른 줄무늬 피라미가 살까. 골짜기로 접어드는 산등선을 타고 오르는 길엔 너도밤나무를 빽빽하게 심어놓았을까.
J가 내일은 로마로 떠날 거란다.
당신은 맏아들에 대한 사랑이 유별하다. 마흔넷에 남편을 잃고서 더 심해졌다고 할까. 이른 봄 산자락을 훑은 산나물은 오빠한테로 보내지고서야 다른 자식들을 챙겼다. 오빠가 집에 내려올라치면 읍내 시장을 누볐다. 미주구리회에 물미역에 대게를 사 와서는 냉장고에 쟁여 넣었다. 가마솥에 물을 끓여 닭을 잡았다. 그렇게 아버지의 부재는 맏아들인 오빠에게로 오롯이 향했다. 엄마의 깊고도 무한한 사랑은 지금 긴 터널을 지난다. 폭우가 내린다. 가슴이 패이고 심장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오그라들었다. 오장육부가 마르고 피가 거꾸로 돈다.
J가 내일은 로마에서 스페인 광장에 들렀다가 바티칸성당으로 떠날 거란다.
J는 성당에서 내 슬픔을 걷어 갈 기도를 해주겠단다. 아주 오래된 내 친구들은 나의 슬픔을 벗겨 내기라도 하듯 나훈아의‘사랑’을 천천히 부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는 마을을 본 사람이 있긴 있을까. 그곳에선 며칠을 살 수 있을까.
J가 간다는 바티칸 성당은 내 슬픔을 아주 오래 천천히 라도 거두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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