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지성 소나기 / 양숙이
서쪽하늘에 먹빛구름이 부글부글 끓더니 하마 같은 입을 벌려 토악질을 해댄다. 이글거리던 태양에 까무룩 기절해 있던 건물과 도로가 혼비백산 깨어난다. 종일토록 길옆에서 찜질하던 승용차 위에도 폭포수가 내리 꽂히니 물 파편이 피융피융 물안개를 내뿜으며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
남편의 퇴근 시간이 늦어졌다.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날이 잦았다. 손에 빵 봉지가 들려올 때가 있었다. 평소 안 하던 행동이라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거니 했었다. 아침잠이 유난히 많은 사람이 늦게 들어와서도 새벽 일찍 나가곤 했다. 통장으로 들어오던 월급이 들쭉날쭉 그르기를 몇 달째더니 그마저도 아예 무소식이었다.
길 아래위로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간다. 우산을 손에 쥐고 헐레벌떡 뛰어가는 아주머니는 미쳐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아이 마중을 가나 보다. 우산을 받쳐 들고 가는 아가씨도 위태위태했다. 아니나 다를까, 휘몰아치는 엄청난 폭우에 우산이 뒤집어졌다. 세찬 빗줄기는 금방 아가씨 굴곡진 몸매를 선연하게 드러내 놓았다.
어깨가 초가집 추녀처럼 축 처진 채 들어와서 밤잠을 설치는 날이 다반사였다. 남편은 그제야 회사에 제일 큰 거래처가 부도났다고 했다. 연쇄 부도를 내지 않으려고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젊지 않은 나이라 쓰러지면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았다. 가진 것 다 쏟아 부었다. 나름 단단하다고 했지만, 한 번 터진 봇물은 여간 땜질을 해도 차츰 누수가 되었다. 남김없이 쏟아 넣고도 모자라 어쩔 수 없이 친인척까지 끌어다 대었다. 그렇지만, 폭우에 비닐우산은 바람 앞에 촛불이었다.
문밖에 쇳소리가 났다. 높은 지대에서 쓰나미처럼 쏟아져 내려오던 빗물이 가게 앞에 세워놓은 입간판을 후려쳤다. 버텨보려고 무진 용을 쓰며 배꼽 인사하듯 끄덕이던 간판이 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끼기긱 신음소리를 내며 뒷걸음을 치다가 그만 벌러덩 뒤로 나자빠졌다. 언제나 나 보란 듯 가게 앞을 지키며 당당하게 서 있더니 거센 물살에 몸을 맡긴 채 기어이 훠이훠이 내 곁을 떠나간다.
설상가상이었다. 안전지대인 줄 알았던 우리 집에 아킬레스건처럼 번갯불이 뻗쳤다. 집배원이 법원에서 날아온 소장을 들고 와서 사인을 하라고했다. 설마 내 보금자리가 회사의 디딤돌이 되어있는 줄 상상도 못했다. 손쓸 사이도 없이 갑자기 몰아닥친 보증재단이라는 거대한 황토물이 대문 앞에 넘실거렸다. 둑이 침수되지 않기 위해서는 가물막이를 설치해야 하는데 자제가 턱없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공사 전문가에게 여쭤보니 공사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눈을 뻔히 뜨고 저수지가 쓸려가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둑이 터지면 저수지 안에서 세상모르게 헤엄치고 놀던 물고기들은 어떻게 될까.
터줏대감처럼 지켜온 정든 이곳을 떠나 어디 가서 몸을 뉘일까. 체면과 남의 이목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남편을 원망만 하고 앉아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홀로 호미가 되어 법원을 드나들었다. 변호사라는 중장비 앞에 호미는 불 보듯 뻔한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집은 30여 년 내가 일궈 온 노력의 대가라고 호소했다. 맨손으로 몸부림치는 나를 안타깝게 지켜본 검사가 국선 변호사라는 가물막이를 선임하도록 선처해 주셨다. 1년여 만에 가까스로 물길은 막았다. 그러나 수마가 할퀴고 간 폐해는 금방 아물지 않았다.
모든 것을 부숴버릴 것 같던 소나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뚝 그쳤다. 빗물을 삼켜버린 하수구 주변과 도로에는 뱉어놓은 부유물만 즐비했다. 어디서 떠돌다 흘러온 것인지 신발 한쪽 덩그러니 남아있다. 살이 부러져 뒤집어진 우산, 누구네 아이가 신나게 걷어찼을 찢어진 축구공, 주인 잃은 장난감도 널브러져 있었다. 쓸려가지 않으려 바닥에 버티고 서서 안간힘을 쓰든 간판을 끌어다 놓았다. 떠내려가며 이리저리 부딪혀 찌그러지고 흙탕물 뒤집어쓴 간판을 세워서 마른걸레로 닦았다. 틈새 고여 있던 뜨거운 빗물 한줄기 서럽게 주르륵 흐른다.
한 차례 국지성 소나기 지나가고 나니 마른하늘에 무지개가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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