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의 기억 / 허정자
낯선 곳에서 생활해 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한줄기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떠나오고 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건만 늘 꿈꾸며 살아간다. 무심한 듯 피어 있는 낮은 담벼락 밑의 작은 풀꽃들, 한적한 시골 돌담골목길이면 좋겠다. 어디쯤엔가 열린 대문사이로 툇마루가 있는 집안의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 보고 싶다. 낯선 곳에서의 바람과 구름은 또 어떤 느낌과 모양으로 다가 오며 지나가는 것일까.
오래전, 파리여행의 기회가 왔다. 한국수필가협회 해외세미나 참가였다. 그동안 글을 전혀 쓰지 못한 채 흘러버린 날들이 너무 많았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쓴다는 것만이 내 삶의 전부이던 젊은 날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게으른 생활에 젖은 나를 보았다. 내 자신을 돌아보며 재충전의 기회로 삼고 싶었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고 싶다는 것이 더 솔직한 고백이었다. 수필공부여행이라 마음이 편안하고 넉넉했다.
한국과 영국 수필문학의 비교인 세미나는 영국의 런던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런던에 가기 전 일행들은 파리에 먼저 들린 것이다.
분명 내가 꿈꾸었던 낯선 곳이었다. 설레임 가득한 여행이지만 목적과 상황은 전혀 다르다. 낯선 풍물 보기에 바빴다. 짜여 진 짧은 일정에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얻어야 하는 숨 가쁜 시간들이었다.
밤의 도시, 빛의 도시 파리다. 그 파리를 상징한다는 에펠탑은 밝은 조명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거대한 탑은 우뚝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밤의 에펠탑 전망대에서 반듯하게 정리된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보석처럼 빛나는 도시는 천연색이 선명한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웠다. 파리와 프랑스의 상징이라는 에펠탑은 방향계의 역할까지도 한다던가. 에펠탑을 내려오면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언제부터 이런 예술적인 감각을 지니게 되었을까. 강변의 건축물과 주택들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동화 속의 집처럼 아담하면서도 예술적인 감각이 깃들어 있었다. 회색빛으로 색의 통일성과 조화의 미를 이루며 예술의 도시임을 전하고 있었다.
낭만적인 분위기 때문일까. 노트르담 대성당은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 영화화된'노트르담의 꼽추’가 생각난다. 꼽추인 종지기'안소니 퀸의 개성 있는 얼굴이 떠오른다. 이룰 수 없는 사랑하는 여인 이스메랄다 옆에서 삶을 끝내는 비극적인 내용이 가슴을 아리게 해 준다. 안소니 퀸이 처절하게 쳐댔던 남쪽 탑의 종은 그 시대에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노트르담 대성당탑 어딘가에 그늘진 얼굴의 종지기 콰지모도가 서 있을 것 같다는 어느 회원의 말에 우리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스쳐 지나는 모든 풍경에 시간과 공간을 담고 싶어 사진을 찍는다. 일행들이 함께 공유했던 사진은 훗날 또 하나의 추억으로 남겨질 것이다. 천국의 길, 낙원의 길이라는 샹제리제 거리를 걸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거리엔 사람들로 넘쳐났다. 우리들은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카페 앞 의자에 앉았다.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지 않고 굳이 차가운 바깥에서 옷깃을 세우고 밤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곧 깨어날 알을 품고 있는 어미 새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읽으며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마셨다. 조금도 막힘없는 유학생의 알찬 설명에 귀 기울이며 열심히 받아 적는 일행들의 모습은 문학성 짙은 훌륭한 작품을 잉태하려는 몸짓이 아닐까.
시각을 달리해서 바라본 샹제리제 거리. 모든 것이 예술적인 멋과 감각이 넘쳐흐른다. 무심히 서 있는 광고판 하나에도 심지어 쓰레기통까지도 같은 색으로 통일감을 주었다. 소품 하나에도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내려고 한 흔적이 보였다. 생활 속에 멋과 감각, 글쓰기에도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또 하다보면 그런 흔적이 남지 않을까. 낯선 곳에서의 기억은 생각만 해도 미소가 떠 오른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습지 풍경 / 엄현옥 (0) | 2022.07.07 |
---|---|
[좋은수필]나무에 길을 묻다 / 전용희 (0) | 2022.07.06 |
[좋은수필]모퉁이 저쪽 / 김채은 (0) | 2022.07.04 |
[좋은수필]그림 몇 점, 토기 몇 점 / 구활 (0) | 2022.07.03 |
[좋은수필]반환점 / 조병렬 (0) | 2022.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