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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나무에 길을 묻다 / 전용희

나무에 길을 묻다 / 전용희

 

 

 

나도 나무를 좋아합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있어 내 마음도 푸릅니다. 산책길을 나서면 제일 먼저 나무를 만납니다. 잎의 푸름이 내 마음에 싱싱함을 줍니다. 따가운 햇살에 그늘을 만들어주고, 공기의 신선함을 더해줍니다. 나무들이 만들어주는 숲 속에서 운동을 하고 휴식을 취합니다. 나무가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주위에서 만들어질 수 없는 게 아닐까요. 나무에 내 인생길에 대한 질문을 던져 봅니다.

당신은 어떻게 덕을 지니고 있습니까? 나의 어린 시절, 당신을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산에 갔던 일을 먼저 고백해야겠습니다. 그때 살아있는 당신을 톱이나 낫으로 베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그루터기를 땔감으로 모아왔던 겁니다. 당신 덕분에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겨우내 스케이트를 만들던 생각도 납니다. 스케이트 타다가 물에 빠져, 발이 시려 혼나기도 했었지요. 모두 당신 덕분에 만들어진 추억이었고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내겐 덕을 가지기가 그렇게 말처럼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욕심이 남아있고,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생각을 좀처럼 버리기가 쉽지 않거든요. 당신이 땔감으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듯이 나를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내어주는 것은 힘듭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은 일은 쉽게 하려 들지 않습니다. 손해 보는 인생을 살기 싫은 거지요. 자신을 희생하여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분들을 보면, 나무 같은 삶을 산다고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난 아무래도 덕이 모자란 사람인 거 같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주어진 분수를 만족할 줄을 아십니까? 태생도 탓하지 아니하고 어디에 놓여있는지에 대하여도 불평이 없지요. 햇살이 따사로운 자리나, 물이 좋은 골짜기를 탐내지도 않지요. 자연이 주는 대로 받고, 얻는 것의 많고 적음에 불평하지 않고 만족할 줄을 알지요. 남의 처지와 비교하는 일도 없잖아요. 키 큰 친구가 작은 친구를 깔보는 일도 없고, 키 작다고 키 큰 나무를 부러워하지도 않지요. 그저 태어난 대로 만족하며 사는 게지요.

나는 어떤 때는 내 분수를 한탄할 때도 있습니다. 왜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으며, 소위 말하는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았는지요. 보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을 아쉬워하기도 하고, 남의 처지와도 자주 비교도 하며 불평하기도 합니다. 왜 나는 키 크고 좀 더 멋있게 태어나지 않았을까, 남을 부러워하기도 하지요. 태어난 대로 만족하며 살아가려 해도 그게 잘 안 되니 내 분수를 모르는 게지요.

당신도 고독을 알고, 나도 고독을 아는 면에서 우린 닮았습니다. 당신께서 아침·저녁으로 느끼는 고독처럼, 나에게도 시시때때로 고독감이 몰려올 때도 있습니다. 별다른 변화 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삶에, 하루하루 다가오는 알지 못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독을 느끼기도 합니다. 가을 저녁의 고독처럼, 해가 저무는 황혼을 바라보는 고독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눈 내리는 겨울의 고독처럼, 나 홀로 서있는 외로움에 때론 몸부림을 칠 때도 있지요. 한여름 대낮의 고독처럼, 숨 막히는 고독감이 몰려오기도 하고, 동짓날 한 밤의 고독처럼, 수많은 생각에 쉬이 잠 못 이루는 밤이 있기도 합니다. 당신이 그런 고독을 견디고 이겨내듯이, 나도 참아내고 떨쳐버려야 하겠지요.

당신에겐 달, 바람, 새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말이 잘 통하고 다정하고, 다른 친구는 지쳤을 때 기쁨을 주기도 하지요. 믿음을 주지도 않고, 때론 상처를 주는 친구도 있지요. 세상 이치가 그런가 봅니다. 이런 친구도 있고 저런 친구도 있고 다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살다 보면 나쁜 친구가 좋은 친구가 되기도 하지요. 다가오는 친구를 당신이 한 것처럼 내치지는 말아야 하겠지요. 누굴 후대하고 누굴 박대하겠습니까.

같은 나무, 이웃 나무가 가장 좋은 친구가 되듯이, 나에게도 비슷한 생각이나 취미를 가진 친구들이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멀리 있는 친구보다도 늘 자주 보고, 서로를 이해하여 주고 잘 통하는 친구가 좋은 친구가 아닐까요. 내가 어려울 때나 아플 때,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그런 친구가 참다운 친구가 아닐까요. 그런 진정한 친구가 몇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생 말년에 친구들이 만나 그리 즐길 일이 무엇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하늘이 내린 은혜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더 힘을 쓰듯이, 우리도 인생을 잘 마무리하고 사회에 봉사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지요. 당신은 모든 걸 다 벗어 버린 채 의연하게 겨울을 이겨내고, 그 힘든 겨울이 지나고 나면 봄마다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무성한 숲을 이루어내지요. 당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임무를 잘도 수행합니다. 가을이 오면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음 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겠지요. 얼마나 많은 찬란한 봄을 당신과 함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도 하늘이 부르면 당신처럼 흙으로 돌아가겠지요. 이양하의 <나무>를 다시 읽었습니다. 다음 세상이 있다면 나도 나무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얼마 전 순천만의 국가 정원에서 팽나무를 보았습니다. 제주도의 물이 부족한 암반 지역에서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육백 년을 살아온 나무였어요. 부족한 수분을 얻기 위해 자기 몸에 스스로 일곱 개의 구멍을 만들어, 비가 오면 그 구멍에 비를 모아서 가뭄에 버티어 왔다는군요. 그 지난한 세월을 잘 견디어 왔다니 너무나 놀라왔습니다. 내 마음속에 그렇게 질긴 생명력과 지혜를 닮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걸까요. 해마다 변하는 주변의 꽃들을 내려 보며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당신은 태어난 환경을 나무라지 않고, 주어진 변화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잘 적응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랜 생명체로 존재하는 이유이겠지요. 서로 싸우지도 않는데, 우리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서로 경쟁을 하지 않고, 천천히 자신만의 속도로만 자라는데 우린 그렇지 못합니다. 바람에 흔들리기 때문에 그 뿌리의 힘이 강해지고 더 큰 나무가 됩니다. 팽나무에게도 흔들림이 없었다면 그렇게 스스로 더 튼튼하게 자라지 못했겠군요. 바람이야말로 더욱 중심을 잡고 더 센 시련에 맞설 힘을 키우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어떤 바람이 불어닥치더라도 굳세게 견뎌내는 당신의 그런 용기와 힘을 배우고 싶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