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과부 틀 / 석현수

과부 틀 / 석현수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오토바이를 과부를 생산하는 ‘과부 틀’이라고들 했다. 아무리 죽는다고 말려도 모터사이클이 가지는 짜릿한 전율은 어느 사치스러운 승용차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 나이 들어 하는 마라톤은 더 빨리 저세상 가는 지름길이란다. 그래서 아내 생각에는 남편의 마라톤은 오토바이 못지않은 '과부 틀'이다. 하지만, 마라톤의 맛 또한 천당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며 막판 깔딱 넘어가는 고개를 넘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진수를 모르리라.

재작년, 09년도 춘천 마라톤을 끝으로 달리기를 접기로 마음먹었다. 환갑 진갑도 넘겼으니 그럴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내렸다. 달리기 동호인들은 내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요즘 예순이 무슨 나이 축에 들기라도 하나. 칠십 노인이 수두룩하고, 팔십 노인이 여기저기 뛰고 있는 마당에 나이를 빌미로 그만둔다니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라고 했다.

식구가 마라톤을 ‘과부 틀’이라 생각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내가 뛰었던 경기가 자주 사고가 따랐고, 당일 저녁 뉴스 시간에는 사망 소식만 크게 다루고 있어 이것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마라톤을 사람 잡을 운동으로 생각했으리라. 나는 머피의 법칙을 동원하여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고 맞대응해 보았지만, 아내의 굳어버린 생각은 돌릴 수가 없었다. 마라톤 경기장에 무려 다섯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던 아내, 보이는 것이라고는 구급차를 타고 수시로 돌아오는 낙오자들이었다. 초주검이 되어 결승점에 들어오는 남편에게는 축하보다는 원망이 가득했으리라. 나잇살이나 먹어가며 무슨 자랑할 것이 없어 저 짓거리 해 놓고 뽐내고 다닐까 싶지 않았을까.

화려하진 않아도 그동안 경력은 10년을, 5시간대를 약간 넘는, 나이에 어울리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출중한 선수도 아니면서 막상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금연 시 나타나는 금단현상처럼 마음이 안절부절못했다. 서랍을 열면 전리품처럼 주워 담아온 기념 메달에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들리기까지 했다. 다시는 뛰지 않겠노라 다짐해 놓고는 아내의 동의 없이 살짝살짝 빠져나가 삼일절 마라톤, 대구 국제마라톤, 서울 한강 마라톤까지 전반기 것은 모두 치렀다. 늘 이것이 마지막입네 하며 은퇴를 재탕 삼탕 해냈다.

재작년 은퇴를 선언했으면 말 바꾸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솔직히 지난해는 마음이 앞설수록 줄곧 체력은 밀리고 있었다. 한때 12월 포항에서 가졌던 구룡포 마라톤에서는 맞바람까지 맞아 가면서도 거뜬히 완주한 적이 있는데, 지난해는 삼일절 마라톤 31Km에서도 발이 엉긴 적이 있었으며, 6월에 있었던 서울 마라톤에서는 기온이 별반 높지 않은 날씨에도 탈진 증세를 보여 비몽사몽간에 헤매기도 했다. 그때마다 식구의 '과부 틀' 생각이 나서 이러다 죽나 싶었다. 모든 것이 아내 몰래 저지른 죗값을 받은 셈이다.

아스팔트 길을 많이 달리다 보니 무릎관절에 이상이 왔다. 관절은 여름을 지나면서 반기를 들었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제법 푯대를 냈다. 순순히 말을 듣고 있을 때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건데 너무 혹사했다. 말로는 뜀박질 그만두었다고 해 놓고는 전보다 더 심하게 부려 먹었으니 말 없는 것이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놈 생각에도 차라리 아내 쪽에 가세해서 ‘과부 틀’ 논리를 밀어주어야 일이 빨리 끝날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종합병원에 가서 무릎관절 사진을 찍었다. 절뚝거리며 들어서는 모습을 본 의사는 나의 상태를 중증으로 생각했는지 바로 서고, 쪼그리고, 옆으로 돌려세우고, 여러 방향에서 영상 촬영을 했었다. 다행히 X선 사진 판독 시에는 생각 밖의 반가운 소리를 해 주었다. 그동안 피로가 누적되어 탈이 조금 난 것뿐이니 두어 달 푹 쉬고 괜찮아지면 계속 달리기해도 문제없을 거란다.

의사의 '이상 없음'과 아내의 '과부 틀' 압박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지만 나는 아내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내 비록 의학적으로는 무릎관절에 이상이 없다지만 노심초사 ‘과부 틀’을 떨치지 못하고 사는 아내를 생각하면 이러다간 오히려 내가 홀아비 틀을 뒤집어쓰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식구 혈압이 더 높아지는 날엔 나도 끝장이다. 기력도 예전 같지 않고 무릎도 때맞춰 나에게 노골적으로 대들고 있으니 울고 싶은 차에 누가 잘 때려주었다. 아내의 애정 어린 설복이 더 시들해지기 전에 다시는 '과부 틀' 가에 얼쩡거리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며 마라톤 10년의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