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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관음죽 꽃이 피었네 / 정호경

음죽 꽃이 피었네 / 정호경

 

 

 

나는 남의 동네 여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공짜로 20년을 살았다. 하지만 나는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내 고향처럼 마음 놓고 편안히 그리고 즐겁게 지냈다. 숨이 차서 헐떡이며 기어올라야 하는 산등성이의 오래된 아파트이기는 하지만, 앞에는 푸른 바다가 있고, 어렸을 적의 하얀 종이비행기처럼 종일 바다 위를 맴돌고 있는 갈매기들이 있어서 나는 아득한 옛날 고향 콩밭 옆의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였던 타작마당을 눈앞에 그리며 늘그막의 여생이 외롭지 않아 좋았다. 뒤에는 또한 소나무 숲이 우거진 야산이 있어서 그 숲에선 아침저녁으로 산비둘기가 매일같이 꼭 같은 곡조로 목을 빼고 울어주어서 집사람이 친구들 만난다고 외출하고 없는, 무덥고 긴긴 여름날에도 나는 종일 외롭지 않아 혼자서 잘 놀았다. 내가 살던 이곳은 수십 동이나 되는 대단지 낡은 아파트촌이어서인지 새로 지은, 바닷가 공기 좋은 아파트촌으로 이사하는 집들로 거의 매일처럼 이삿짐 운반차의 짐 올리고 내리는 리프트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어떤 가정은 오래된 운동화 하나 남김없이 말끔히 쓸어가는 싹쓸이 스타일의 가정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열 개가 넘는 고급 화분들을 아래 아파트 정원에다 모조리 버리고 가는 낭비성 무소유의 가정도 있었다. 이런 경우 또한 예쁜 화초 선택보다는 윤기가 나고 값비싼 화분만을 탐내어 뒤적거리고 있는, 세속적 욕망이 보기에도 민망스러운 이웃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각자의 취향대로 한두 개씩 골라 들고는 횡재했다는 표정으로 각자의 아파트 주소로 다람쥐처럼 익숙하게 찾아들어가는 인생의 우스꽝스러운 풍경을 나는 우리 아파트 앞을 지나다 종종 본다.

내 집사람은 옛날 젊었을 적에 꽃집 딸이라거나 혹은 나를 만나 결혼한 후 화초나 꽃나무 재배 전문 강습소를 찾아 익힌 것도 아닌데, 화초나 꽃나무 가꾸는 솜씨가 좋아 일가친척들이나 이웃 아줌마들에게서 종종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손이 예뻐서 그런가 하고 몰래 훔쳐보기도 했지만, 아내의 손에서 그런 근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두꺼비 손으로 크고 뭉뚝하여 재래시장 한복판의 시루떡 장수 아줌마의 손이라고 하면, 누구나 별 이의 없이 받아들일 손 모양이었다. 거기에다 태생적으로 성격이 무던하여 자신에게 누가 무슨 험담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종일 거실에 앉아 그 많은 마늘 한 접의 껍질을 맨손으로 다 까고 나서야 일어서는, 지구력을 자랑하는 인내파이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종일 마루에 앉은 채 일을 너무 오래 끌어서 신경이 예민한 나를 괜히 피곤하게 만드는 때도 있었지만, 나는 집사람에 대한 호감도好感度를 오히려 그런 일상의 느긋한 행위에서 찾아보기도 한다.

하루는 늦은 오후에 집에 들어오는 집사람의 손에 낡고 조그만 화분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바싹 말라 영양부족으로 보이는 꽃나무가 하나 힘없이 기대어 있었다. 집사람은 내가 묻는 말에 대답도 않고 베란다로 가서 내려놓기가 무섭게 며칠 전에 쓰다 남은 화분용 거름과 분갈이에 쓰는, 검은 흙을 고루 섞더니 조금 큰 화분에다 옮겨 심었다. 동백나무라고 하는데 영양실조로 말라비틀어진, 허약한 꽃나무를 무슨 희망으로 사 갖고 왔느냐니까 우리 아파트 어느 집에서 또 이사를 갔는지 현관 앞 화단에 버려둔 화분 가운데서 이 동백나무가 하도 가엾게 보여 들고 왔다는 사연이다. 그런 뒤 볕살 좋은 곳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곤 하던, 2년쯤 지난 어느 봄날 아침에 집사람이 소리를 질러 가보니 푸른 잎사귀 사이로 빨간 입술의 꽃봉오리를 내밀고 있지 않는가. 오동도에서 보는 그것보다는 봉오리가 작기는 했지만, 빨갛고 예쁜 입술의 그 꽃봉오리는 오동도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집사람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 덕택이었을까. 집사람은 그 꽃봉오리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앉아 있었다.

어느 하루는 그전과는 또 다른, 큰 화분을 집사람이 현관의 경비원까지 동원해 들고 들어왔다. 역시 이사하는 어느 가정이 버리고 간 그 꽃나무는 관음죽觀音竹이었다. 잎은 꽃나무 이름대로 꼭 댓잎처럼 생겼는데, 수많은 잎이 달려 있는, 꼿꼿한 줄기는 1미터가 넘는 큰 키였다. 집사람은 이 녀석을 다시 살려 건강하게 만들어보겠다고 일부러 흙이며 거름을 잔뜩 사 가지고 와서 본격적인 분갈이 작업을 시작하더니 아침에 시작한 일이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끝이 나는 종일 작업이었다.. 이 녀석은 키가 커서 작은 꽃나무들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베란다의 한쪽 구석에 앉혀놓았더니 혹시 소외감을 느껴 서러워하지 않을까 하여 내 마음에 걸렸지만, 베란다 꽃밭의 조화로운 배치를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관음죽이라는 이름 그대로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대처럼 푸르고 곧게 잘 자랐다. 병들지 않고 잘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우리 내외에게는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 뒤 나도 집사람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3년쯤 지난 어느 날 아침 집사람이 별안간 물귀신을 만난 듯한 경기驚氣를 일으키며 나의 팔을 잡아끌며 관음죽이 있는 베란다로 갔다. 몇 년 만에 한 번쯤 핀다는 관음죽꽃이 피어 있지 않은가. 다른 꽃들처럼 귀엽고 예쁜 것은 아니었지만, 관음죽 꽃이 피면, 집안에 행운이 찾아온다는 말을 예전부터 집안 어른들에게서 들어왔다면서 집사람은 좋아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사람이 그토록 애써 키워 꽃을 피우게 한 보람인지 나는 그해 20128월 한국문인협회에서 주는 올해의 수필인상을 그해에 출판한 수필집 오늘도 걷는다마는으로 받았다. 이는 현재 거주하고 있는 수상자의 고장에서 시상 행사를 하기 때문에 전국 각지의 문인들이 여수엑스포이후의 관광을 겸해 많이 찾아와 나의 수상을 축하해주어서 고마웠다. 그런 영광을 누린 3년 뒤 봄에 놀랍게도 관음죽이 두 번째 꽃을 피워서 이것이 도깨비가 아닌가 하고 숨을 죽여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는 역시 조화造花가 아닌 생화生花로 현실화되어 20156월 수필집 해 저문 날의 독백으로 ‘조경희수필문학상’을 받아 관음죽의 개화로 인한 두 번째 기적의 행운을 만나 나는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손을 맞잡은 듯한 기쁨을 누리게 되어 정말 행복했다.

삶의 의욕에 벅찼던 집사람도 한평생의 자진自進한 과로로 지쳐서인지 자주 병석에 눕게 되니 분당에서 살고 있는 자식들이 자꾸 불러올려서 마지못해 20년을 살던 여수 집을 정리하고 작년 9월 이삿짐을 싸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노부부의 까대기였지만, 막상 이사를 하려고 보니 많은 것을 버려야 했다. 한평생 내 서재의 글벗이었던, 4천 권이나 되는 책은 여수시 도서관에 기증할 수밖에 없었고, 오래된 가구를 비롯해 많은 화분도 남에게 주거나 버렸다. 그렇지만 나에게 두 번이나 큰 문학상을 안겨다준관음죽만은 꼭 챙겨 가려고 집사람이 이삿짐센터 직원들에게 신신부탁을 했지만, 화분은 파손을 막기 위해 맨 마지막에 자리가 비는 대로 싣겠다고 잘라 말해 두말을 못 하고 있었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실을 자리가 마땅찮아 장롱도 모두 화단에 남겨둔 채 떠났다. 집사람은 눈물을 글썽이며 직원들에게 통사정을 했지만, “그 비싼 장롱도 다 버렸잖아요.” 하며 집사람을 나무라며 또한 달래고 있었다. 나도 섭섭한 마음은 다를 바 없었다. 두 번씩이나 큰 행운을 안겨다주었으니 차마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우리가 떠난 뒤 이 관음죽큰 화분을 안고 갈 이웃이 누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대신 정성과 사랑으로 다시 키워 더 큰 행운을 품 안 가득 안게 되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