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보탬 / 허서경자
녹색의 차밭에서 죽음을 본다. 오래전에 세상을 하직한 이들의 흔적이 무덤으로 봄볕 아래 놓여 있다. 이 세상에서 한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 죽어서 거기 그렇게 묻혀 있다.
산비탈 지형에 펼쳐진 차밭은 노곤하지 않은 초록빛이었다. 야트막하나 그래도 경사가 진곳이라 쉬엄쉬엄 올라오다 고개를 들어보니 문득 눈앞에 차나무가 무성했다. 흐드러지지 않은 푸릇한 잎들이 구부러진 두둑을 이루고 있었다. 일상의 주변부가 섞이지 않은 마음으로 머물 수 있으리라는 절연한 설레 임이 일었다. 한숨 돌린 마음으로 바라본 차밭 군데군데에 몇 기의 묘지가 있었다. 살아있는 기운이 찻잎의 푸르름으로 날 것인 공간에 버젓이 자리한 산소는 충격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밭은 혼자 가야 한다는 말을 실감했다. 내면 깊숙한 곳과 닿아있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이 되었다. 마른 흙에 발을 대고 한자리에 오래 서서 머물렀다. 숨어있던 어떤 감성이 이랑 진 골을 걸어 들어가 몇 번을 돌아 나오며 어느새 세상을 잊은 지점까지 도달한 듯했다. 혼자라는 느낌이 사라지고 이 우주에 존재하는 알 수 없는 많은 것들과 합쳐지는 마음이었다. 무덤으로 서먹했던 마음의 경계가 넓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보면 살아있는 자와 죽은 사람은 우선 시간이 흘러가는 방식부터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미세한 소리의 울림이나 빛의 음영도 같지 않다. 생 과 사라는 말이 거느리는 이미지나 울림의 진폭이 큰 것은 그 때문일 터이다. 무덤가로 자리를 옮겨 흔들림 없는 손으로 잔디를 쓸고 볕 바른 봉분에 눈을 주었다. 망자가 편히 쉴 조용한 곳으로 이장(移葬)을 하지 못한 후손들의 어떤 사연이라도 수긍하는 심정이 되었다.
습한 육질 속에 녹아있는 오월 풋것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이골 저골 로 다니는 곡우에 맞춰오긴 했다. 길게 구불 지어진 차밭에서 어린 새순을 따는 여인들이 보였다. 채다를 하다 가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품새에서도 아련한 바람이 일었다. 푸른 찻잎들 사이로 도르르 말려 뾰족하게 솟은 가운데 잎이 창(槍) 바로 옆의 갸우뚱하게 벌어진 잎이 기(旗)라고 했던가. 참새의 혀를 닮았다고 해서 작설차라 한다는 어린 찻잎의 향이 무덤 속의 저들에게까지 스며들었으면 하는 기원이 들었다. 혼자 마시는 차가 고귀하고 함께해도 나뉘지 않는다는 차의 기품을 망자에게 주고 싶다. 가난하고 외로운 찻잔 속에서 고요히 자유로워지라는 축원을 보내게 된다. 마음에 반영하 듯 훈풍이 불었다.
차밭의 이랑은 길게 구부러져 있다. 옛 어른들이 집을 나가는 자녀들에게 그저 구불구불 하라고 이른 말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다. 앞의 구불은 남을 대할 때의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이고 뒤의 구불은 웃음의 별칭인 구불약(九不藥))을 이른 말이라고 했다. 얼굴에 웃음을 띠면 아홉 가지 부정적 요인이 사라진다고 하여 대인관계의 보탬을 일러주었다고 한다. 차를 마실 때 감도는 긍정의 느낌을 차나무가 자라는 밭고랑에서 상징시키고 있다.
두둑이 시작되는 곳에 오래 서 있으면 사람 살이의 표면이 드러나고 또 감춰지듯 그렇게 인생의 고랑을 지은 모양으로 다가오는 차밭을 볼 수 있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비스듬히 껴안고 가는 마음의 지형이 거기 그대로 누워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먼 깊은 산속에서 다스려지지 않는 자신의 내면을 만난 격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비뚤어진 밭두렁마저 인간의 품성을 생각하게 하던 산비탈이 떠올려 지리라. 찻물의 수증기 속에서 차밭을 품은 산 능선이 다소곳하게 휘어 내리는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이 비탈진 밭에서 자라는 차나무 한 그루를 또 그렇게 평평하지 못한 마음 안으로 옮기고 있다.
처음 마주할 때와 달리 묘지는 한결 평화로워 보였다. 사람들의 생이 계속되는 한 죽은 이들의 터전은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처럼 편안하리라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간절해지는 어떤 욕망이 차밭의 무덤가에서 메워지는 것 같다. 죽어서 땅에 묻힘으로 흙을 보태주는 행위가 순리이기에 봉분의 잔디도 순해 보였다. 그래서인가 삶을 다한 육신을 내주어 땅심을 깊게 만든 오래된 산소에 저절로 두 손이 모아 졌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듯 신록의 오월에 노란색으로 물든 찻잎이 떨어지고 있다. 따뜻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슬밋슬밋 어깨에 떨어지는 햇빛이 가벼웠다.
뭔가 뜻밖의 것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사람을 사로잡는 기이한 허기가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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