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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해변에서 / 박지평

해변에서 / 박지평

 

 

포항은 내 유,소년기가 숨 쉬는 곳이다. 친지의 병문안 차 오랜만에 들른 그곳은 거리며 사람이 죄 낯설어 무인도에 떨어진 양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해변에 나가 보았다. 일곱 살 때의 모래밭은 무릉도원이었다. 발목을 간질이는 모래는 황설탕처럼 부드러웠고, 밑에는 살아있는 조개가, 위에는 소꿉에 쓸 껍질이며 조약돌이 지천이었다.

해변 놀이의 절정은 모래성 쌓기에 있다. 곧 허물어질 성을 나는 어쩌자고 쌓고 또 쌓았을까. 모래는 다정했다. 모래를 끌어안고 성을 쌓노라면, 반짝임 자체만으로도 그것은 희망이었다. 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지평선 너머에선 물비늘을 탄 노래가 끝없이 밀려왔다. 그곳 말고 더 좋은 곳은 없었다.

엄마의 부재가 두렵게 느껴지던 즈음이었다. 그녀는 날 딱 한 해 키워놓곤 사라져버렸다. 자신이 태어 난 곳, 바다로 간 것 같았다. 나는 걸핏하면 해변으로 갔고, 아버지는 걸핏하면 불호령을 내렸다. 꾸중의 가치가 관심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 역시 추억의 한 자리이겠지만, 내 평화를 아버지는 왜 그토록 꾸짖으셨는지, 신발에 묻어온 모래와 익은 얼굴은 감출 수가 없었다.

모래는 결핍된 현실을 누르는 내 낙원, 그 낙원을 지금은 굴착기 여러 대가 헌 솜을 타듯 뒤집고 있다. 우리의 생이 얼마나 무거웠으면 사람들 지나간 자리가 저토록 내려앉은 걸까. 굳이 여전한 걸 찾자면, 바다 빛과 바다가 밀고 온 수초 정도라고나 할까.

부두를 축항이라 했다. 선착장을 의지해 배가 닿으면 사람들의 몸에선 활기가 넘쳤다. 왁자하게 지펴지던 어부와 장사치, 소금과 얼음을 나르는 일꾼들로 위판장 바닥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냄새는 포구답게 삶의 진실과 애환을 그대로 비린내에 담아냈다. 나열된 수선소 부근에는 배의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늘 쇠망치소리가 났다. 그곳에는 도시를 책임 진 진정한 꾼들이 모여 있었다. 그래서 순결했다. 다 어디로 갔는지 흔들리던 배 한 척 보이지 않는다.

시간 안의 존재는 모두가 변한다. 생판 다른 풍경이라 하더라도 수용을 거부해선 안 된다. 내 삶 망망대해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나 막연하게 기다리는 어떤 것과 그곳은 고리로 엮여 있었다. 내리쬐는 태양과 빛나는 모래, 바다가 있는 곳은 성으로 가는 길, 내가 집으로 가는 길이다. 나는 그곳에다 언제나 초막을 짓고 싶었다.

, 테마 거리라는 해변을 걸어본다. 바위벽에 엉겨 붙은 조가비처럼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작렬하던 여름 해가 수평선 너머로 물러나고 옅은 어둠마저 스러진 지금, 이곳은 이제부터 기지개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벗겨지는 거리, 북새통의 장터인가 하면 축제장, 도깨비가 판을 치는 파젯날 같기도 하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청춘들은 내일 써야 할 집중력 따위는 아랑곳없다. 때맞춰 건너편 상가는 홍등 같은 불빛을 쏘아 오직 먹고 자고 즐기라 부추긴다. 낡은 모래와 소음, 쌓이는 쓰레기와 젊은이들의 야행성, 해변은 내 것이기에 그 통속성이 참을 수 없는 외로움으로 왔다. 어느 곳을 봐도 벗은 유년을 달래주던 정서와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낙원은 이제 엷은 향수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땅 위의 것들과 무관하다는 듯 바다는 방자한 무리를 빗겨 모로 앉았다. 그 습하고 어두운 얼굴은 거대한 공간을 소리로 채우고 있었다.

이튼 날이다. 남은 것은 없을까 제발, 해변으로 나갔다. 불어온 적 없는 눅눅한 바닷바람이 피로와 무력감에 젖은 얼굴 위를 훅 끼친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해는 심심한 바다 위를 빠르게 채색한 후 놀랄 정도의 기운으로 힘차게 솟아올랐다. 금빛 물결이 순식간에 번져 와 발을 적신다. 발등을 돌아 나온 물결의 무리가 엄마의 손결인양 숨결처럼 부드럽다. 나는 치마가 젖어 무겁도록 해안을 따라 걷고 걸었다.

어머니가 깃든 바다, 잃어버린 것들의 기억은 모두 바다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