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 권동진
재개발의 뒷전에 밀려난 노후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봐도 외벽의 회칠은 흉하게 벗겨지고 수십 년 지탱해온 세월의 무게와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투박한 콘크리트 골조에 흉터가 가득한 복도식 난간만 배를 불뚝하게 내밀고 있다. 당장 철거해도 조금의 아쉬움도 없을 것 같다.
길 건너편에는 최근에 건축된 세련미 넘치는 고층 아파트의 불빛이 환하게 뿜어져 나온다. 인근 상가에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치는데 이곳은 겨울바람만 차갑게 온몸을 감싸고돈다. 인적은 드물고 낡은 창 사이로 듬성듬성 새어 나오는 불빛도 온기를 잃어 싸늘하다. 보온을 위해 창틀을 가려놓은 비닐이 동짓달 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은 떠나고 빈집이 태반이다. 주위의 활기와는 거리가 먼 도심 의 섬에서 어머니가 살고 있다.
외딴 섬처럼 외롭고 낡은 아파트에 들어선다. 주인의 행색을 닮아서인지 가재도구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유일하게 벗이 되어주는 TV도 화질이 선명하지 못하고, 압력 밥솥도 실없이 바람이 빠져 밥이 설 된다. 작년에 맏사위가 사다 준 번듯한 김치 냉장고도 재 구실을 못하고 한쪽 구석은 쌀독이 되어버렸다. 식탁은 마주 앉아야 할 식구가 없다며 벽을 향해 돌아서 있다. 출입문 앞에 놓인 뒤 굽이 닳은 신발 한 켤레가 주인이 걸어온 인생 여정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전기장판은 엉덩이에만 온기를 줄 뿐 방안은 냉기로 가득 차고 훈기가 없다. 적막 속에서 차가운 바람만이 창을 두드린다. 유일하게 외부와 연결되는 빨간 유선 전화기의 벨 소리만이 외딴 섬으로 오가는 연락선의 고동 소리다.
독거노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울해진다. 어머니와 함께 살지 못하는 맏이로서의 죄책감 때문이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별 한지도 어언 20년이 지났다. 청상과부는 아니라지만 졸지에 남편을 잃은 상실감과 외로움으로 견뎌온 세월이다. 아버지는 횡단보도를 건너다 무면허 음주 운전자의 자동차에 치여 졸지에 돌아가셨다. 당신의 장례를 마칠 때까지 어머니는 세 번 까무러쳤었다. 운전자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무어라 말할 수 있었겠는가. 눈물로 세월을 보내도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동생들은 하나 둘 출가하고 결국 어머니는 홀로 살게 되었다. 지난겨울 함께 살자며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왔지만, 당신은 한 해 겨울도 넘기지 않은 채 다시 독거 생활로 돌아갔다. 무엇이 불편한 것이었는지는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잘 모른다. 한정된 공간 아래서 같이 살아보지 않았으니 왠지 서로 불편했었다. 오랜 세월 따로 살아온 마음의 거리와 공백을 메우기에 한 해 겨울은 너무나 짧은 것이었다. 모자지간 소통의 장벽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오래 동안 홀로 살면서 이미 타인의 섬을 이루고 있었다. 당신은 자식이나 가족의 잘못을 말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음의 침묵이 서로를 옥죄었다. “어려서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밟고 커서는 부모님의 마음을 밟는다.”라는 글귀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가족이 있어도 혼자 거주하는 노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독거노인’ 참 쓸쓸한 단어다. 독거와 노인이 합성어가 되어버린 세상이 원망스럽다. 평균 수명이 연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삶의 질적인 측면에서 안정된 노년이 보장되는 경우는 드물다. 가족과 함께 살더라도 질병이 생기면 흔히 요양병원으로 보내어진다. 얼마나 질적인 의료서비스를 받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르신들은 요양병원을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말한다. 그곳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양병원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까닭은 뭘까. 수요만큼이나 공급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어렵고 힘든 병시중을 직접 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삭막하고 이기주의적인 세태의 반영이라고 생각해 본다. 요양비라는 명목적인 금전 지출로 의무를 다하고 가끔 요양원을 찾아보는 것으로 자식 된 도리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도 있으리라.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산다는 것은 외로움이다. 즐거워도 슬퍼도 나만의 섬에서 사는 것이다. 벽을 보고 박장대소 실없이 웃을 수도 없을 것이고, 슬픈 일이나 화나는 일이 생겨도 털어놓고 이야기할 대화 상대가 없으니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
어머니가 다시 혼자만의 생활로 돌아가신 이후 일 년이 지났지만, 아직 ‘함께 살자.’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당신의 완고한 성정에 생채기를 낼까 두렵다는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실어오는 쪽배를 준비하지 못하고 뭍에서 섬 만 바라보고 있다. 돌아선 식탁에 올려져있던 신경증 약봉지가 못난 놈이라고 항변한다.
모처럼 어머니와 밥상머리에 마주 앉는다. 자반고등어, 청국장, 시금치 무침, 계란말이가 상에 오른다. 당신의 반찬솜씨는 지난날과 비교해도 조금도 녹슬지 않았는데 고장 난 밥솥으로 지어 윤기 없이 퍼석한 밥알을 목구멍으로 넘기려니 울컥 설움이 복받친다. 내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돌아다니면서 밥솥 하나 얼른 사다 드리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니 참 한심하다. 병들어 혼자 사는 것도 서러울 텐데 당신은 자식의 무관심을 섭섭하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으신다.
가전 판매점에 들렀다. 멋진 디자인을 하고 진열대를 차지한 압력밥솥 앞에 머문다. 4인용 밥솥과 8인용 밥솥 가운데 8인용 밥솥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가난했지만 부모님과 여덟 식구가 서로 비비며 살았던 그 시절을 어머니에게 다시 돌려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큰 밥솥 해서 뭐 하려고”라는 어머니의 자조 어린 말은 밥을 많이 하더라도 밥상머리에 둘러앉을 식구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제사 때도 우리 집에서 가족이 모이니 큰 밥솥이 효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눈길을 떼지 못한다.
식구라는 사전적 의미는 “같은 집에 살면서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혼자서 밥상을 차리고 다문다문 발길을 하는 자식을 기다리는 나의 어머니는 식구라는 이름 대신 홀몸노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외딴 섬처럼 살아간다. 오늘도 혼자서 밥을 짓고, 신경증 약을 복용하고, 육 남매의 소식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릴 것이다.
큰 밥솥에 밥을 짓고 어머니 손맛 깃든 반찬으로 시끌벅적 식구들이 자주 둘러앉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내 편하자고 시속 흐름에 가볍게 편승하여 아픈 치부를 감추며 살 것인가. 외로움에 시름겨워 화석처럼 굳어져 가는 당신의 어깨를 주물리고 있노라니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눈자위에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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