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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초대 받지 않은 손님 / 권순우

초대 받지 않은 손님 / 권순우

 

 

 

한 달에 한 번씩 서울로 갑니다. 실밥같은 좁은 길이 아니라 죽 뻗은 경부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차창으로 다가오는 풍경을 즐기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는 지도 모릅니다. 구름도 쉬어 간다는 추풍령을 넘어섭니다. 뜬금없이 길의 끝은 어딘가 라는 의문이 고개를 듭니다. 길에서 길로 이어지는 길의 끝을 누구도 찾아내려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이 미지수 이듯 말입니다.

금강을 낀 휴게소는 상행선과 하행선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개소일이라는 금강 휴게소에서 쉬어갈 참입니다. 개소일에 맞추어 몸단장을 하기까지 꽤 오랫동안 문을 닫았었습니다. 몇 년 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두고 우리 내외는 이곳에서 심각한 언쟁을 하였지요. 불꽃 튀기는 장면이 화염산열기처럼 이글거립니다. 위기 일보 직전의 화염이 금강의 푸른 물결에 휩싸입니다. 시간만큼 좋은 치유 약은 없는 듯합니다.

신축한 화장실이 금강석처럼 빛납니다. 바람 소리를 내는 청죽이 마음을 맑혀줍니다. 마주친 여학생들이 참새떼처럼 조잘댑니다.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 어쩐 일이냐고 물었지요. 금관악기를 연주하러 왔다는 대답이 씩씩합니다. 여고 시절 악대부에 뽑힌 저는 시골 아이 답지않게 얼굴이 뽀옜습니다. 악대부를 안 하겠다고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지요. 그때 부모님을 모셔오라던 선생님이 야속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학교 출입 뒤 악대부를 그만 둘 수 있었습니다.

대머리 담임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게 무척 아쉽습니다. 악기 하나 쯤 다룰 수 있으면 얼마나 근사할까요. ‘노는 아이로 보일까, 기회를 놓친 기억에서 빠져나와, 손을 씻는 여학생에게 무슨 악기를 다루느냐고 물었습니다. 꽃보다 예쁜 여학생은 호른이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소리를 내느냐고 또 물었지요. 조금 망설이더니 신비한 소리라고 하더군요. 세월이 주름살로 내려앉은 얼굴이지만 마음은 저와 같다는 걸 눈치 챈듯 마주보고 웃습니다.

호기심이 고개를 드는 순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정오에 개소식을 한다더니 이미 옥천 여중학생이 부는 금관악기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 신비한 소리를 낸다는 여학생을 찾기 위하여 고개를 기웃 거립니다. 왼쪽 맨 앞줄에 앉아서 둥그런 호른을 불고 있는 여학생과 눈인사를 나눴지요. 어느새 저는 악대부 소속의 여학생이 되어 있었거든요. 축하곡이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활짝 핀 들장미처럼 생기 발랄합니다. 축하 테이프를 끊을 때 플래시가 번쩍이고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삼단 화환과 호접난이 실내를 가득 메워 딴 세상에 온듯 황홀합니다. 꽃이 귀한 겨울철이라 반가워서일까요. 화환에 둘러싸인 실내에서 쿵작쿵작 하는 금관악기 연주에 신바람이 납니다. 악기와 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눈치 채셨지요. ‘절정이라는 시에 나오는 겨울 무지개처럼화사한 분위기에 편승, 행복한 웃음을 날립니다. 금강의 물굽이가 풍광을 더해 주어 금상첨화입니다. 호른에 반하고 새롭게 단장한 인테리어에 취했다 할까요.

이층에는 축하상이 차려지고 있습니다. 한복으로 멋을 낸 사장님으로 보이는 여인이 두 아가씨의 부축을 받으며 올라 간 뒤였습니다.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에게 다가 갔습니다. 호접난 꽃이 노랑 나비인양 날아다니는 가운데 오찬이 차려진 방에는 초대 손님만 앉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래층에 가면 이사 떡을 먹을 수 있다고 선수를 친 분은 제 옆짝입니다. 과연 아래층 테이블 위엔 반짝이는 수저들이 윤기를 내고 있었으니까요.

넥타이를 맨 옆짝과 창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정장을 한 옆짝이 식장 분위기와 잘 어울려 으쓱한 기분입니다. 요기를 하려던 참에 해파리 냉채를 먹는 행복함이라니요. 장내에는 단체장과 업소 종사자와 학생들로 붐빕니다. 드넓은 벽면에 멀티미디어 장치를 해놓아 가수들이 축하 노래를 띄웁니다. 나는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지만 개소식에 어울리는 화기애애한 얼굴입니다. 박수를 치고 금강 휴게소의 발전을 빌었음은 물론입니다.

여기서 멈출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천연덕스레 선물을 받으러 갔습니다. 방문 일지가 휴게소 마당에 놓인 아가씨 앞으로 갔습니다. 바로 앞 신사 분에게 상냥한 얼굴로 선물을 주던 아가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딴청입니다.기다리다 못해 먼저 아는 척을 할 수 밖에요. 조금 전 선물 받아 가세요. 라는 방송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서야 못이기는 척 긴 우산을 꺼내주었습니다. 물론 저는 초대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래 전부터 금강 휴게소의 고객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고객이 될 터이니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 온 새집에서 동네 사람들과 이사 떡을 나눠 먹는 미풍양속 때문일까요. 논두렁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새참을 나눠 먹던 순후한 음식 문화가 그리워서일까요. 아련한 호른 소리가 울려퍼지는 공간에서 벽사의 뜻이 담긴 시루떡을 먹던 분위기가 행복하게 해주어서일까요.

가끔은 누군가를 기쁜 마음으로 대접해야겠다는 결심을 마음속 깊은 자리에 새깁니다. 경부선을 달리던 나그네가 들장미처럼 생기 발랄한 사람들과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푹 젖었다 할까요. 산허리를 끼고 굽이쳐 흐르는 금강이 좋아서 단골이 된 금강 휴게소를 뒤로 합니다.

길은 길로만 이어집니다.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하여 시원하게 뚫린 경부 고속 도로를 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