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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달팽이 자물쇠 / 박향숙

달팽이 자물쇠 / 박향숙

 

 

 

골목으로 접어든다. 붉게 녹슨 대문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고동친다. 조금 있으면 엄마가 잰걸음으로 나와 셋째 딸을 맞아줄 것이다. 차 소리에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대문 고리를 채운 달팽이 자물쇠를 보는 순간 서운함이 엄습해 온다.

엄마가 집을 비울 땐 대문에 늘 달팽이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굵은 철사를 달팽이 모양으로 구부려서 만든 이것은 뱅뱅 돌리기만 하면 누구나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잠깐 다녀오겠다고 문을 나선 뒤 아직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 대문 앞을 서성거린다. 문 사이로 삐죽이 나온 도깨비바늘이 적막에 싸인 내 어깨를 찌른다. 따끔하다. 떼고 털어내도 얼얼하다. 갈고리 같은 털을 하나씩 다 뽑고 나서야 겨우 진정된다.

힘껏 대문을 밀쳤다. 시월의 햇살이 푸지게 쏟아진다. 삐걱대는 소리에 옆집 개가 자지러진다. 아주머니도 놀라 신발을 끌며 달려 나와 마당을 살핀다. 매일 보던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허전하다고 말끝을 흐린다. 주인 없는 마당에 잡초가 뿌리를 내렸다.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앉은 호박 넝쿨이 늦둥이 아들을 생산한 안주인의 끈질긴 삶처럼 탐스러운 호박을 맺었다.

빈집에 잘 영근 호박이라니. 아주머니께 물어보았다. 엄마가 밭에서 따온 호박이 썩어서 저절로 싹을 틔운 것이라고 했다. 엄마가 있었다면 지금쯤 호박 부침개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다. 애호박을 하나 떼어 아주머니께 내밀자 집에 갈 때 가져가라며 손사래를 친다. 지난해 감이 빨갛게 익어가던 날, 이웃들과 함께 밭에서 거두어 온 누런 호박이 저절로 삭고 발아해 엄마를 기다린다.

호박꽃이 노란 등불로 앉아 있는 마당에 하릴없이 시간만 축내고 있다. 엄마의 손길이 가지 않은 뜰에는 잡초들이 마음 놓고 살림을 차렸다. 마당에는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 잡초가 눌러앉았고, 엄마의 뇌 속에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뽑히지 않는 치매가 잠식했다. 맨드라미도 못 보고 백합 향기 그득한 마당을 거닐어 보지도 못하고 병중에 있다. 이맘때쯤이면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집에 모여앉아 이야깃거리가 동나도록 웃음꽃을 피웠을 텐데, 엄마가 좋아하던 꽃은 어디에도 없고 잡풀만 무성하다.

머리채 움켜잡듯 한 끄덩이 낚아챘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 호미로 한참을 씨름하고 나서야 질긴 목숨을 겨우 내놓는다. 허리까지 오는 풀은 호미로는 턱도 없다. 낫을 휘두르자 항복한다. 마지막으로 담장 위에서 저항하는 환삼덩굴까지 물리치니 집 모양이 나온다. 옆집과 모호했던 경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풀숲에 묻혀 있던 석류나무도 제 모습을 찾았다. 한때는 꽃을 피우지 않아 엄마 속을 태우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봄이 오고 오뉴월이 되자 보답이라도 하듯 주홍빛 석류꽃을 선물해 주었다. 달빛에 빛나는 꽃이 흡사 마당에 띄워 놓은 황색 풍등 같았다. 엄마는 한동안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결혼하고 딸을 낳아 친정에 갔을 땐 복주머니 같은 붉은 열매가 한껏 달려 있었다.

세월이 살처럼 흘렀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무는 점점 기력을 잃었다. 몇 해 전부터는 잎이 누렇고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했다. 설령 살아난 석류라 해도 거무죽죽한 저승꽃을 피운 채 뚝뚝 떨어졌다. 몸뚱이는 여기저기 울퉁불퉁 튀어나오고 두드리면 악기처럼 통통 소리가 났다. 어느새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뀌어버린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래도 서 있는 자체만으로도 고마웠다.

그즈음 엄마에게도 이상한 낌새가 나타났다. 대전에 사는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엄마가 가스레인지 잠그는 걸 깜빡해 냄비를 태우고 아버지를 볼 때마다 화를 내는 게 좀 이상하다고 했다. 얼마 전에 갔을 때만 해도 두 분은 나란히 메주콩을 고르고 있었다. 믿기지 않았다. 우리 부모는 치매에서 괜찮을 줄 알았다. 남동생이 엄마를 시골에 있는 한 노인 요양원에 모셨다. 평생을 같이해온 아내가 그곳으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 농사일까지도 손 놓아버렸다. 부부로 오래 살면 어떠한 것도 닮아 가는 것일까. 잘 견디던 아버지도 얼마 못 가 요양병원 신세를 졌다.

엄마와 아버지는 동네에서도 금실 좋기로 소문났다. 그런 배필이 서로 떨어져 있어 안타까웠다.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엄마도 모시자고 동생과 상의했다. 엄마가 이 병원으로 왔다는 말에 아버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를 볼 때마다 손맛이 뛰어나고 다듬이질을 잘했다고 엄마를 칭찬했다. 내가 좋아하는 인절미도 차지게 만들었다며 집에 들러 다듬잇돌과 떡돌을 꼭 가져가라고 일렀다. 그 말이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 되고 말았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엄마를 칭찬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엄마는 아직도 아버지가 모내기하는 줄 안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서글픈 현실, 나무는 나이를 먹어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건만 엄마는 하염없이 기울어 간다. 목젖이 도깨비바늘에 찔린 듯 자꾸만 따갑다. 그때처럼 이 나무 아래 서서 엄마와 나란히 석류꽃을 바라보고 싶다. 응석도 부리고 싶다.

지나가는 바람결에 큰 풀이 일렁인다. 잡풀이 수북한 빈집이어도 계절마다 알아서 피는 꽃이 있어 그나마 썰렁하지 않다. 엄마가 좋아하는 꽃들이 만발할 때 툭툭 털고 집으로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달팽이 자물쇠가 돌고 돌아 풀리듯 엄마의 기억도 거짓말 같이 돌아오길 바란다면 어리석은 생각일까. 그런 날이 올 수는 있을까. 대문을 나선다. 돌아보니 석류나무가 손짓하는 것 같다. 예전의 엄마가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