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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절반의 즐거움 / 이정기

절반의 즐거움 / 이정기

 

 

아무도 없는 세상처럼 고요하다. 일찍 일어나야 되는 날인데 느지막이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새날을 마주하는 처음은 늘 똑같으리라 생각했지만 오늘은 다르게 시작하는 아침을 맞는다.

아이들이 못 올 것 같은 예감을 하면서도 며칠 전부터 장을 보러 다녔다. 애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며 목록을 만들고 시간 계획을 세웠다. 기다려지는 사람이 있음에 마음은 풍요롭고 즐거웠다. 달력을 쳐다보며 날짜를 꼽아보고, 혹시 코로나로 묶인 규제들이 풀리려나 싶어 뉴스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헛기다림이었다. 애들은 기어이 오지 않는다. 이것저것 준비해온 장거리들을 뒤적여 보지만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삶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며 정겨운 한때를 보낼 수 있는 기회는 명절이 아니면 어렵다. 그것이 녹록지 않은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즐거움마저 통제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허참 어쩔 수 없네, 우리끼리라도 잘 살아봅시다.”라며 남편도 허전한 마음을 애서 추스른다. ‘아이들 안 오면 편하지 뭐.’라고 혼자 중얼거려보지만 아쉬움은 가시지 않는다. 우리가 외로운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만남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절감하는 순간이다.

명절 음식으로 아침상을 준비했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은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의 얼굴만 쳐다봐도 행복하고 배부를 것 같은데 오늘 아침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며느리도, 손자 손녀들의 얼굴도 보이질 않는다. 어제와 다름없이 둘뿐이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라는 공광규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마치 둘만 있어서는 안 되는 날인 것처럼 마음이 휘하다. 참된 행복이란 나를 위한 밥상 차림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먹는 즐거움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 지난날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대가족 시절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아름다운 전설처럼 그리워진다.

늦은 아침상을 물리고 나니 스마트폰이 울린다. 큰애 가족들이 베트남에서 세배를 하겠단다. 손바닥만 한 화면 속에서“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합창을 한다. 웃으면서 응대했지만 영상매체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는 많이 어색하다. 조금 있으니 둘째네 가족들이 영상으로 세배를 한단다. 넷이 나란히 절을 하고 새해 인사를 주고받았다. 함께 둘러앉아 맛난 음식을 먹으면서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들을 아주 중요한 사건인 양 떠들어댈 자식들의 모습이 아니다. 세뱃돈 주는 재미도 받는 즐거움도 없다. 아이들은 차가운 화면 저쪽에서 환하게 웃고만 있다. 우리는 이쪽에서 끌어안는 시늉을 하면서 빈손으로 세뱃돈을 주는 연기를 한다. 베트남에서, 서울에서, 그리고 우리는 대구에서 서로 마주보며 웃고 인사하였다. 얼마나 먼 거리인가. 참 이상한 세상에 별난 세배를 다해본다.

한차례 그리운 얼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스마트 세배가 끝났다. ‘눈앞에 물이 넘실거리는데 마시려고 하면 물러나 버린다.’는 그리스 신화‘탄탈로스의 형벌’처럼 디지털 온라인상의 만남이란 바로 눈앞에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들의 얼굴이 있고, 목소리가 귓전을 울리는데 손 한번 잡아볼 수 없고, 품어줄 수도 없는 상황이 그야말로 ‘탄탈로스의 갈증’과 같이 우리의 가슴을 애타게 만든다. 그러나 건강한 얼굴들이라도 보았으니 절반의 즐거움으로 행복을 찾는다.

소파에 기대앉아 TV를 보다가 바닥에 눕고, 다시 일어나 뭘 먹고, 또다시 누워 뒹굴뒹굴. 이렇게 심심하고 무료한 시간을 죽이느라 몸부림치고 있다. 하루를 가파르고 다급하게 살아내던 젊은 시절에는 얼마나 간절했던 지금의 이 여유로움이었던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음껏 늘어져 쉬어보자, 그래도 괜찮다. 이것이 내 삶의 여백이다.’라고 중얼거렸는데 그 여백이 너무 넓어져서 스스로를 삼켜버린 것 같다. 해가 질 때까지 온종일 쉬었는데도 칠순의 뼈마디가 다 쑤시고 아프다. 삶이 낡았다는 생각에 마음마저 허물어지는 느낌이다.

모두가 아픈 세상이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생기고, 그 낯선 환경에 길들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했다. 좀 더 기다려보자. 언젠가는 지난 시간의 어둠 걷히고 환한 얼굴로 한자리에 앉을 날이 오겠지.

비록 반쪽짜리 만남이었지만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온라인 세배도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찾아올 가족을 기다리며 그들을 위해 뭔가를 준비하던 순간은 분명 행복이었다